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브랜디를 모르는 사람도 코냑은 안다고 할 정도로 프랑스의 코냑 지방은 브랜디의 주산지로 유명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으니, 포도의 품질이 남쪽 보르도만 못해 그냥저냥 싸구려 와인이나 만들어 팔았다.
그런데 1630년대에 접어들며 상황이 일변한다. 세제가 바뀌면서 졸지에 오크통이 과세 기준으로 둔갑했다. 세리들의 토색질에 숨기고 감추다 지친 코냑 주민들은 궁리 끝에 절세의 비법을 고안해내고야 말았으니, 바로 증류다. 포도주를 정제해 오크통의 개수는 줄이고 부가가치는 높인 절묘한 해답이 실은 조세저항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세금이 혈세인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비일비재한데, 가끔 징세를 넘어 불순한 손길이 개입하면 잔혹사의 발단이 되기도 한다. 2008년 국세청의 태광실업 세무조사가 그러했다. 사업은 물론 가족들의 안위까지 들먹이며 스위스산 명품시계의 행방을 캐묻는 세리들 앞에서 박연차 회장은 “노무현 대통령께 가져다 드렸다”며 백기를 들고 말았다. 나중에 ‘논두렁 시계’로 알려진 오보 소동도, 끝내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부른 수사도 시작은 검찰이 아니라 국세청이었다.
그 국세청이 금융정보분석원(FIU·금정원) 자료를 통째로 들여다보겠다고 한다. 그렇게만 해주면 연 4조~6조원의 추가 세금 추징은 거뜬하다는 호언이 대단하다. 대통령직인수위도, 새누리당도 한 해에 27조원씩 5년간 135조원이 필요하다는 박근혜표 복지재원 마련에 한시름 덜까 하는 기대로 자못 고무된 표정이다. 민주통합당은 물론 진보진영 역시 복지라는 포장에 혹했는지 묵인 또는 방조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음습한 지하경제에 메스를 대고 불로소득에 철퇴를 선사하겠다는 대의명분엔 시비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국세청과 그 언저리에서 제시하는 ‘최대 6조원’의 셈법이 초등생 산수에도 못 미칠 수준이고, 기왕에 금정원이 추려준 ‘엑기스’를 토대로 국세청에서 추징한 연간 세액이 ‘겨우’ 1232억원(2011년, 국회 입법조사처)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자꾸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더 분명히 짚어야 할 대목은, 국회 인사청문회 따위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신상털기의 우려다. 연말정산 서비스에서 언뜻 보이듯 국세청은 과세 인프라의 확충을 통해 웬만한 납세자의 전대와 지갑 속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그 강력한 권한이 오·남용될 경우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이른바 ‘세풍 사건’이 여실히 보여주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권력의 수하’임이 확인된 국세청(IRS)에 족쇄를 채운 미국과 달리, 우리는 몇 차례 결정적 탈선을 보았음에도 국세청을 가장 불투명한 기관인 채로 방치해두고 있다. 세무조사만 해도 대상 선정의 기준은 국세청만 아는 비밀이다. 영장 없이 계좌를 쫓고, 기업의 장부도 그냥 가져다 본다. 이렇게 모은 방대한 정보를 누가 어떻게 관리하며 어디에 활용하는지는 국세청 바깥의 누구도 모른다. 국세청은 국회가 자료 제출을 요구해도 거부하기 일쑤고, 정보공개청구 비공개 처리 건수도 10건 중 4건꼴(2011년)로 정부기관 중 으뜸이다.
그런데도 국세청은 이른바 ‘4대 권력기관’ 중 유일하게 기관의 직무 범위와 권한, 책임 등을 규정한 법-검찰청법, 국가정보원법과 같은-이 없이 운영되고 있다. 대통령이든 청장이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거리낌없이 부릴 수 있다는 점에서 국세청은 대검 중수부보다 막강하고 국정원보다 위험할 수 있다.
코냑 동네의 선조들은 명품 브랜디라도 남겼다지만, 복지와 추가 세수의 유혹에 넘어가 가뜩이나 힘센 국세청에 견제 대신 권한만 안겨준다면 훗날 그 책임을 어찌 감당할지 무척 난감하다.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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