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
호랑이가 곰방대를 물던 시절이 있었듯,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 과거엔 이따금 현실이 되기도 했다. 예컨대 대통령을 지낸 이가 사법부의 수장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 설화 같은 일의 주인공은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그 태프트)인데, 그는 1921년 대법원장에 취임하면서 “나는 내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제법 근사한 어록을 남겼다. 그의 심중을 이제 와서 온전히 헤아릴 길은 없으나, 정치와 사법의 경계를 분별하는 그 의지만은 높이 살 만하다.
내친김에 미국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자. 우리의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합쳐 놓은 듯한 미국의 연방 대법관은 법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다. 더욱이 “품행이 선량한 한”(during good behavior) 계속할 수 있는 사실상의 종신직이니 ‘세상 최고의 직업’이란 수식어가 결코 허언이 아니다. 그 대단한 자리에 오른 지 19년 만인 2009년 6월 워싱턴을 뒤로하고 고향인 뉴햄프셔의 낡은 시골집으로 돌아간 이가 있다. 당시 나이 69살, 대법원에서 넷째로 젊은(?) 대법관이던 데이비드 수터다.
재직 중 수터는 하루 12시간씩 ‘일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고, 법복이 장롱에서 가장 화려한 옷이었다고 할 정도로 소박한 삶을 살았다. 어쩌다 사들인 주식이 대박을 터뜨린 덕에 재산이 물경 2500만달러를 넘나드는 부자이기도 했지만, 워싱턴의 호사스런 관사 생활을 마다하고 교외의 작은 아파트에 세 들어 살며 낡은 폴크스바겐을 몰아 출퇴근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그는 ‘보수’(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지명을 받았지만, 재임기간 중 첫 1년여를 빼고는 이후 내내 진보의 편(2000년 부시 대 고어의 대선 소송에서도)에 서서 한참 선배인 해리 블랙먼의 뒤를 착실히 따라 걸었다.
남의 떡이 자꾸 커 보이는 까닭은 내 떡이 작고 보잘것없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특히 근자에 더 높아 보이는 자리, 더 폼 나는 권력을 걸터듬다 반면교사가 된 전직 대법관들이 늘었으니, 가령 김용준은 대법관 6년에 헌법재판소장 6년을 보태고도 총리직을 기웃대다 최단기간 내 위신 파산이라는 민망한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그보다 조금 앞엔 대통령의 러브콜 한마디에 대법관 임기의 절반을 버리고 이직한 김황식이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온 국민에게 권력욕의 무상함을 두 차례나 일깨워준 이회창이란 아련한 이름도 있다. 이들에게 불편부당, 독립 같은 기초 덕목들은 대법관 임기 동안 쓰고 있다 벗어버리면 그만인, 빛깔 고운 너울 같은 것이었을까? 이들의 행로는 “나는 내가 대법관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너절한 고백으로 읽힌다.
그래서 김능환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는지도 모른다. 사법시험 동기인 노무현이 일찍이 “가장 뛰어난 법관”이라고 상찬했다는 그가, 퇴임 후 편안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는 변호사 개업이나 남들 다 가는 로펌행을 접고 아내가 차린 편의점 일을 돕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김용준의 낙마 이후 박근혜 정부의 첫 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던 그는 지난 1월, 위원장으로 주재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회의에서 이런 소신을 말했다. “대법관을 지낸 사람이 또 다른 조직에서 자리를 맡을 수는 없다.” 2006년 국회 인사청문회에선 “대법관 퇴임 후엔 동네에 책방 하나 내고, 이웃 사람들에게 무료 법률상담을 해주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4년 전 오바마는 낙향하는 수터에게 “그는 훌륭한 법관이기 이전에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김능환의 선택을 보며 나는 수터에게 바쳐진 이 헌사를 떠올렸다.
강희철 오피니언넷부장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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