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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폭탄주도 ‘윗분’ 눈치보는 박근혜 정권

등록 2013-10-02 18:45수정 2013-10-03 12:11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6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김기춘 비서실장과 함께 회의장에 걸어들어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6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김기춘 비서실장과 함께 회의장에 걸어들어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편집국에서]
비서실장이 부른다고 여당 지도부가 공관에 떼거리로 몰려가
“대통령 코앞”이라며 폭탄주 빼…‘소신’은 사라지고 ‘충성 경쟁’만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무총리와 청와대 쪽의 거듭된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퇴한다고 할 때 참 용기 있는 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신과 자리가 부딪칠 때 자리를 내놓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게 세상살이다. 더구나 그 자리가 가문의 영광인 장관직이 아닌가. 웬만한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나 소신이 묵살당해도 그냥 숙이고 산다. 멀리 갈 것 없이 이 정권에서도 자신이 주도한 정책이나 법안이 대통령 말 한마디에 하루아침에 뒤집혀도 군소리 없이 열심히 일하는 영혼 없는 공직자들을 숱하게 봤다. 이런 마당에 “양심”을 좇는 장관이 나왔으니 신선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반응은 정반대다. 정책에 대한 이견을 용인하기는커녕 진 장관의 사퇴 자체를 대통령에 대한 항명과 배신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홍원 총리와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최경환 원내대표, 김태흠 원내대변인 등 이 정권에서 한자리하는 사람들은 모두 나서 한목소리로 ‘진영 때리기’를 하고 있다. 심지어 그를 당에서 출당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유를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배신자’로 낙인찍힌 사람을 더 세게 짓밟아야 ‘윗분’에게 잘 보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종의 충성 경쟁이다.

하지만 해결은커녕 문제가 더 커지고 있다. 조용히 사표를 수리했으면 ‘진영 문제’가 됐을 텐데 업무복귀 명령이니 어쩌니 하면서 불통이라는 ‘박근혜 문제’로 번지고 말았다. 충성꾼들이 정권에 도리어 큰 손해를 입힌 셈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자해적 충성 경쟁은 더 심하면 심했지 당분간 개선될 것 같지 않다. 1일 저녁 서울 삼청동 대통령비서실장 공관에서 있었던 당·청 모임에서 이런 예감을 받았다고 하면 너무 민감하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김기춘 비서실장이 주재한 삼청동 모임은 박근혜 정권의 운영방식과 실세들의 사고방식이 드러난다. 정치에서 밥 먹는 것은 중요하다. 두 사람 이상의 모임은 항상 모양과 격식이 따르며, 대개 초청자가 이니셔티브를 쥔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비서실장 공관 모임은 겉 명분이 무엇이든 실질 목적은 명확하다. 김 실장이 청와대와 당을 아우르는 정권 2인자로, 당도 비서실장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이런 메시지는 더 분명해진다. 민주화 이후 청와대 비서실장이 밥 사겠다고 여당 지도부를 이런 방식으로 부른 적도, 부른다고 떼거리로 달려간 사례도 없다. 대통령이나 총리도 아닌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밥 “신세 지는” 것은 아무리 여당이지만 체통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이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휘둘리지 않았던 과거 정권과 비교된다.

모임에서 ‘진지하게’ 술 종류를 고른 일도 흥미롭다. 이들은 “대통령 코앞”이기에 반주를 폭탄주 대신에 와인으로 마셨다고 한다. 술 문화를 바꾸는 차원이 아니라 멀지 않은 청와대 관저에 있을 박근혜 대통령을 생각하면서 폭탄주를 뺐다니 정말 정신이 확 깬다. 이쯤 되면 ‘윗분’을 모시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

김종철 정치부 기자
김종철 정치부 기자
대통령은 정책을 조율하는 행정부 수반이지 감히 얼굴을 쳐다보기 힘든 ‘윗분’이 아니다. 승지(비서실장)를 통해 뜻을 전달받아야 하는 임금이 아니다. 비서들이나 장관이 정책을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맞서야 하는 동지 겸 지도자일 뿐이다. 대통령이 없는 자리에서도 이렇게 주눅 들어서야 어떻게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사고가 가능하겠는가.

진 전 장관은 보스에게 일방적이고 폐쇄적인 문화를 싫어하는 정치인이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나 박 대통령 곁을 과거 몇차례 물러난 것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그가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책 소신뿐 아니라 질식할 것 같은 박근혜 정권의 이런 분위기 탓이 아니었을까.

김종철 정치부 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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