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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담화와 대책 사이에 / 강희철

등록 2014-05-25 18:52

강희철 사회부장
강희철 사회부장
‘아들 부시’가 임기 막판까지 ‘테러와의 전쟁’을 밀어붙이던 2008년 6월의 일이다. 연방대법원은 쿠바 관타나모 등 해외 미군기지에 수용돼 있는 외국인 테러 용의자들도 미국의 민간법정에 재판을 청구할 헌법적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전쟁포로의 지위조차 인정할 수 없다던 부시에겐 불의의 일격으로 비쳤음직하다. “안보는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는 원칙 위에 존재해야 한다”는 판결에 부시가 “존중하고 따르겠지만,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항변한 건 당연지사였던 셈이다.

기왕 섬길 자유이고 받들 인권이라면 레임덕 이전에 선언하지 그랬느냐는 만시지탄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고 법원의 존재증명을 보는 것 같아 반가웠다. 모름지기 사법부는 그래야 하느니.

6년 전 남의 나라 얘기를 새삼 들춰내게 한 건 난데없이 대통령의 ‘조연’으로 등장한 우리네 대법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9일 대국민 담화에서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처럼 “심각한 인명 피해 사고”를 일으키거나 “먹을거리 갖고 장난쳐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람들”에겐 ‘선진국’과 같이 수백년 형을 부과할 수 있도록 형법 개정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잠시 저간의 사정을 복기해 보면, 박 대통령은 그 이전에도 국민에게 사과할 수 있는 계기가 몇 차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과’ 대신 ‘사회’를 보거나, “엄벌”과 “문책”을 되풀이 강조하는 ‘유체이탈’ 화법으로 기회를 날렸다. 실기에 실기를 거듭한 뒤 여론조사 그래프에 떼밀려 ‘정치적 사과’를 서두른 탓에 박 대통령이 열거한 대책들은 고강도 처방 일색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 대법원(법원행정처)도 ‘세월호 사건 관련 사법부 종합대책’이라는 것을 내놓았다. 여기서 대법원은 “현행 형법상 경합범 가중 규정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그 책임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감안하여… 바람직한 입법이 이루어지도록 사법부 차원의 연구·검토에 즉시 착수할 계획”이며, 특히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식품범죄 등에 관하여”도 전국 형사법관포럼에서 논의하겠다고 발표했다.

정치인인 대통령의 레토릭에 시시콜콜 토를 달 생각은 없지만, 대통령의 담화가 끝나기 무섭게 여당도 법무부도 아닌 사법부가 즉시 검토 착수를 외치고 나선 이유가 무엇인지는 못내 궁금하다. 대법원은 지난 2004년 판결을 통해 가중 처벌의 방법은 ‘입법자의 재량’이라고, 그러니 바꾸든 아니든 그쪽의 몫이라고 확인까지 했었다.

게다가 문제의 수백년 형이 누구 말마따나 미국이 서부개척시대에 만들어 놓은 법을 못 고친 것이든 안 고친 것이든, 채 백년도 살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어떤 실효성과 경고의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도 적이 의심스럽다. 유기형에 유기형을 포개고 얹겠다는 그 ‘강화’가 유한한 생명 탓에 ‘누적’이 될 수 없는 바에는 결국 ‘엄포’만이 남을 터인데, 그보다 더없이 무겁고 무서운 사형 앞에서도 미미한 ‘범죄 예방효과’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통령이 “먹을거리 장난” 운운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식품범죄에 대한 적정한 양형 논의’란 항목에 이르러선 이른바 ‘정부 시책’을 복창하던 ‘아버지 박 대통령’ 시절 대법원의 모습이 떠올라 적잖이 민망했다. 가끔 대통령의 정강이를 걷어차도 모자랄 판에, 모름지기 사법부가 그래선 안 되는 법이니.

박 대통령이 2012년 침몰한 ‘콩코르디아호’의 선장에게 2697년형이 구형됐다는 외신 보도를 본 뒤 “이 내용(수백년 형)을 직접 담화에 넣은 것으로 전해졌다”는 <동아일보>의 보도가 맞다면 더욱이 그렇다.

강희철 사회부장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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