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철 사회부장
“첫 뇌물은 담배 한 갑이었다.”
한때 중국 최대 독직사건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무쑤이신 전 선양시장의 고백은, “권력형 비리 사건에서 처음부터 돈 보따리 싸들고 덤빈 사람은 아직 못 봤다”는 김진태 검찰총장의 수사 경험담과 정확히 통한다. 그리스어 ‘파켈라키’(fakelaki)는 직역하면 ‘조그만 봉투’지만 실생활에선 우리네 ‘촌지’와 똑같은 뜻으로 쓰인다.
대부분 작은 인연에서 비롯되는 부패가 장구한 로마사 전체를 통틀어 교정의 속도를 능가했노라고,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에 썼다. 그러니 “조건 없이 주는 돈이 어디 있냐.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정태수 전 한보 회장의 과거 법정 발언은 그가 터득한 인류사적 보편 진리를 담고 있는 셈이다.
그 진리 아닌 진리를 아예 추방하자는 이른바 ‘김영란법’이 다시 힘을 받는 모양새다. 최근 대통령이 채근하고 나섰기 때문인데, 그의 뻔한 정치적 동기와는 별개로, 3개월째 논의 자체를 중단한 국회는 몹시 곤란한 처지가 됐다. 담배 한 갑이 금괴로 업그레이드되고 바늘도둑이 소도둑으로 변신하는 일이 없도록 100만원 선에서 촘촘한 그물망을 치자는데 이를 한동안 방치했으니 변명이 궁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5월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의 회의록은 저간의 사정이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내용은 취지를 왜곡하지 않는 범위에서 축약. 질문은 의원, 답변은 주로 정부안을 만든 국민권익위원장)
-일반 기업체에 다니는 (국책은행) 직원의 동생이 금품이든 뭐든 편의를 제공받았다고 해서 은행 직원을 형사처벌한다면 그 사람이 그걸 받아들이겠어요? “이거는 이렇게 해서 사회를 바꾸자는 취지이기 때문에….”
-민간인이에요, 민간인. 아니, 전세계에 그런 입법례가 있어요? “유사례는 거의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170만명을 규율하면서 거기에 가족 셋 하면 570만명인데, 아니 10명 하면 2200만명…. “연좌제는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사촌형이 서울시 도로교통국장인데, 1000억짜리 지방도 발주권이 있어요. ㅎ건설이 이 도로를 따내려고 해요. 사촌인 나는 ㅎ건설에 작년에 입사했어요. 영업부서에 있으면 직무 관련자가 되는 거지요? “그럴 것 같습니다.”
-이 법을 내고 10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재검토 의견도 안 내고 그냥 이 법을 통과시켜 달라…? 이게 전 국민적으로 파급효과가 엄청나게 큰 중요한 법인데, 공청회를 거친 일이 있습니까? “한 차례는 입법예고안 마련 전에 하고, 한 차례는 입법예고안을 가지고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입법 공전’의 모든 책임을 국회에만 묻기에는 정부안이 너무 허술했다. 적용 대상이 500만에서 2000만을 헤아리는 유례없는 법을 추진하면서 ‘연좌제’의 위험조차 간과한 것은 싱크홀로 돌진하는 운전자만큼이나 무모해 보인다. 대의에 밀려 자신의 목을 겨냥해야 하는 국회 입장에서 ‘구멍 숭숭’ 정부안만큼 핑계대기 좋은 구실이 또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회의록에는 “대한민국 국회는 영원히 있습니다. 우리가 안 하면 다음에 하면 되지요”라는 발언도 나온다.
예의 기번은 “입법자들의 지혜와 권위가 자기 이익을 지키려고 혈안이 된 자들의 잔꾀와 겨루어 승리한 예는 거의 없다”고 했다. 하물며 입법의 주체와 핵심 대상이 겹치는 김영란법에는 더한 지혜와 권위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인 셈인데, 엉성한 정부안이 행여 ‘명분은 우리가 취할 테니 불발의 멍에는 여의도에서 짊어지라’는 꼼수는 아니길 바란다.
강희철 사회부장hcka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