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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원세훈 판결’이 약과라면 / 강희철

등록 2014-09-21 18:27

강희철 사회부장
강희철 사회부장
정치는 “범죄계급 중에서도 특히 저급한 족속들이 즐기는 생계수단”이고, 종교는 “그 안에 사악한 온갖 새들이 저마다 둥지를 틀고 있는 훌륭한 나무”다. <악마의 사전> 첫 페이지에서 마지막 장까지 거침없는 독설과 신랄한 야유를 늘어놓은 앰브로스 비어스가 ‘사법’ 항목이라고 곱게 넘길 리 만무했으니, “충성과 납세, 개인적인 봉사에 대한 보수로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강매하는 품질 나쁜 상품”이라는 한 줄을 기어코 남겼다.

사법 종사자들의 혈압을 한껏 높여줄 이 고약한 언사를 떠올린 건 ‘원세훈 일부 무죄’ 판결 때문이다. 판결이 알려지기가 무섭게 재판장이 대법원장의 대법관 시절 ‘사노비’(전속 재판연구관)였기 때문이라느니, 머지않은 승진 인사를 염두에 둔 재판장의 승부수라느니 여러 뒷말들이 나왔다. 개연성이 있기는 한지 법조계 사정에 정통한 이들에게 의견을 청해 봤다.

“판결문을 정독해 보니 재판장의 신념 같아요. 결론은 말할 것도 없고 논리 구성이나 전개도 그렇습디다.” “위에서 ‘오더’가 내려갔을 가능성? 없다고 봅니다. 위험을 무릅써가며 군사독재 시절처럼 그렇게 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법관들 스스로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둬도 충분합니다. 빠른 속도로 개개인이 보수화되고 있으니까요.”

대답들은 이번 판결이 이심전심의 소산일 수는 있어도 어떤 공작의 산물이기는 어렵다는 쪽으로 모아졌는데, 누군가가 정신을 퍼뜩 차리게 만드는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로스쿨 출신들이 법관이 되면 더 많은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때 가서는 지금이 약과였다고 할지도 몰라요.”

정리하면 이런 얘기다. 로스쿨은 뜻이 있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3년간 ‘공식’ 학비만 4천만원에서 6천만원, 이런저런 ‘비공식’ 학비를 더하면 1억원 안팎이 든다. 가물에 콩 나듯 하는 장학금은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사교육비 지출 1등을 다투는 나라에서 대학까지 마친 자녀에게 억대 학비를 댈 수 있는 가정은 많지 않다. 한 해 정원의 5% 남짓 뽑히는 ‘사회적배려대상자’는 비용을 감당 못해 중도 포기가 많고, 그 자리는 억대 학비를 쓸 수 있는 학생들이 메운다.

지난달 발표된 ‘법조인 선발제도별 법조계 진입 유인 실증분석’이라는 논문도 부모가 최소한 소득 상위 30%에 들지 못하면 자녀들의 법조계 진입은 엄두도 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로스쿨 1~3기생 중 열에 여섯은 서울에 살고, 그중 셋은 강남3구 출신이다. 같은 기간 서울대 로스쿨 입학생 셋 중 하나는 특목고를 나왔다. 퍼즐을 맞춰 볼수록 로스쿨생들의 출신 계층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런 그들이 내년부터는 사법부에도 진출한다.

“제 경험으론 로스쿨생들이 보수적 입장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이 있어요. 뽑을 때부터 출신 대학과 학점 등을 주로 보는데다 기본적으로 집안 좋은 학생들이 오잖아요. 보수적인 성향은 이른바 명문대 로스쿨생들일수록 더 뚜렷합니다.”(한 로스쿨 교수) 법관은 법과 양심에 따라 독립해 심판한다지만, 자신의 경험과 무관한 양심이란 게 따로 존재할 수 있을까? 가뜩이나 보수화되고 있는 사법부에 이들까지 가세하면 그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악마의 사전>에서 비어스는 ‘법관’을 “신의 권능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공무원”이라고 정의했다. 그가 살던 10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토록 지대한 권능이라면 특정 계층의 독과점을 허용해선 안 될 터인데, 우린 안전장치도 없이 반대편 길로 내달리고 있다. 무지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강희철 사회부장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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