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 국제부장
“전쟁은 시작될 것이다”라고 써붙인 북한 미사일과 탱크가 등장하는 촌스런 영화 포스터를 앞에 두고 ‘누가 보겠어’라고 생각했던 게 몇달 전이었다. 관객들의 마음에 다가갈 영화로는 보이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 암살을 소재로 한 그 영화 <인터뷰>는 이제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제작사인 미국 소니픽처스의 컴퓨터 시스템이 해킹당하고 해커들의 테러 위협으로 영화 상영이 취소된 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지목했고, 급기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북한을 겨냥해 ‘비례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공언한 직후 북한 인터넷 사이트들이 연 이틀 마비됐다. 일파만파의 나비효과다.
김정은 제1비서를 인터뷰하게 된 미국 토크쇼 사회자와 연출가가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령을 받아 김정은 암살에 나선다는 이 영화는 애초 그저 그런 B급 코미디 영화로 막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엄청 재미없는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미국 토크쇼)에 항문에 대한 바보 같은 집착, 마약과 연예계 관련 농담, 저속한 대화를 추가하면 이 영화가 된다”(<월스트리트 저널>) “4400만달러나 들었다는 예산이 어디 쓰였는지 알 수 없는 따분한 화면”(<뉴욕 타임스>) 등의 혹평이 줄을 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영화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로 만든 것은 ‘최고 존엄’을 지나치게 의식한 북한의 과잉대응이었다. 지난 6월 예고편이 공개되자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우리 최고 지도자에 대한 공격을 묘사한 영화를 상영하는 행위에 단호하고 무자비한 대응을 하겠다”고 했고, 자성남 유엔 주재 북한대사는 “주권국가의 현직 국가원수 암살을 다룬 이런 영화를 만들고 배급하는 것은 노골적 테러이자 전쟁 행위”라고 비난하는 서한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냈다.
속옷만 입고 등장하는 기쁨조, 타고 가던 헬기가 미사일에 맞아 김정은 제1비서의 얼굴이 불타는 장면이 등장하는 이 영화가 북한 입장에서는 참기 힘들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북한은 종종 악당으로 묘사됐지만, 지도자 ‘암살’을 직접 등장시킨 것은 처음이다.
그 행간에는 북한 혐오와 ‘정권 교체’ 욕망도 어른거린다. 이 영화의 감독·주연인 세스 로건은 <롤링스톤스>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해적판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혁명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했다. 우파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의 안보 분석가인 브루스 베넷이 소니픽처스 최고경영자 마이클 린턴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김정은 암살 장면의 수위를 낮추지 말라면서 “한국에서 실제로 그런 구상(김정은 암살 시도)을 시작하게 만들 수도 있고, 디브이디(DVD)가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북한에서도 이런 구상이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조언한 내용이 해킹으로 공개됐다.
북한은 “미국이 근거 없이 우리를 해킹 배후로 지목했다”며 반발하고 있지만, 북한이 몇달 동안 이 영화를 거세게 비난한 데 이어 해킹과 상영 취소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 내에선 ‘북한 독재자가 미국을 검열하고 있다’ ‘북한이 우리 언론 자유를 침해했다’는 비난 여론이 급속히 확산됐다. 북한 인권 문제가 주요 국제 이슈가 된 상황에서 북한에 대한 반감과 ‘표현의 자유’ 논쟁이 맞물리며, 미국과 한국에서 모처럼 흘러나오던 북한과의 대화 움직임은 꽉 막혀버렸다.
대북 강경파들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고 소니는 성탄절에 우선 300여개 극장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다. 한국의 자유북한운동연합 등은 이 영화를 담은 디브이디 삐라를 북한으로 날려보내겠다고 한다. 또 한번의 삐라 사태가 한반도를 위태할 기세다. 김정은 암살 영화로는 북핵도 북한 인권 문제도 풀 수 없다. 코미디가 공포영화가 되기 전에, 외교와 대화가 더욱 절실해졌다.
박민희 국제부장 minggu@hani.co.kr
이슈김정은의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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