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작은 연립 빌라들이 모여 있는 한 동네 아담한 상가 3층 문 앞에서, 한번 심호흡을 했다.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꽃나무가 흐드러진 공원 너머 단원고가 멀지 않은 곳에 416기억전시관이 있다. 여기선 지난 2일부터 개관전 ‘아이들의 방’이 시작됐다.
4·16 가족협의회와 416기억저장소의 의뢰를 받고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의 사진작가들은 수개월 동안 학생들의 방을 찍어왔다. 촬영 중 기록작가들은 가족들의 구술작업을 벌인다. 희생자 전체를 목표로 한 작업 가운데 일부가 지금 서울 통의동 류가헌에서 열리는 ‘빈방’전에 나왔다. 안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 전시를 보고 나서였다.
방인 듯 물속인 듯, 짙고 푸른 벽에 걸린 사진 옆엔 부모들이 구술한 내용 일부가 적혔다. “구글아 기다려라” 당찬 포부부터 “아빠 쿨피스~ 난 쿨피스 자두맛이 제일 좋아” “엄마 내가 염색해줄게”같이 다정했던 일상의 순간이 새겨진 공간 가운데엔 이불들이 쌓였다. 1년 전 진도체육관에서 가족들이 아이들을 기다리며 수없이 눈물 적셨던 그 이불과 매트다. 빈방엔 아이들 삶의 체취가 담겨 있다. 10반 단비의 책상엔 2014 학교 일정 캘린더가 붙어 있다. 내 아이들 방에는 매해 캘린더가 바뀌지만, 그 방에 더 이상 새 캘린더는 붙지 못할 것이다. 4반 경빈의 방에는 내 아이들이 태권도장 다닐 적 찍었던 것과 비슷한 포즈의 사진이 보인다. 거기에 더 이상 새 액자는 걸리지 못할 것이다.
역사학자 미셸 페로는 ‘개인의 방’이 근대 및 개인주의의 탄생과 맞물려 있다 했던가. 내게 아이들의 방은 한국 사회 서민과 중산층 삶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고급 아파트건, 허름한 연립이건, 웬만한 집에선 이사하면 먼저 아이 ‘공부방’부터 정하려 하기 마련이다. 자식 하나 잘 키워보겠다는, 우리 사회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꿈이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다.
고백하자면, 사람들의 ‘세월호 피로감’이 이제 한계라 생각했다. 배·보상금 발표를 앞두고는 비판여론 의식부터 했다. 그러던 어느 아침, 세월호 인양 찬성이 70%라는 한 신문의 여론조사 결과를 읽다가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썩은 곳을 제대로 도려내지 않고 새살이 절로 돋기만 기다릴 순 없다는 걸,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정부가 내놓은 특위 시행령은 특위 규모뿐 아니라 조사 대상, 종합대책 범위까지 모두 축소해버리지 않았는가.
전시관 벽엔 방문자들의 다짐을 담은 노란 메모지가 별처럼 늘어간다. 1주일에 하루를 ‘안산에 내려오는 날’로 정해 살고 있는 명지대 김익한 교수를 우연히 만났다. 그와 함께 1년 전 팽목항에 달려갔던 제자 권용찬씨는 기억저장소 기록관리팀장을 맡으며 아예 안산으로 이사했다. “그동안 역사라는 게 결국 잘난 사람들이 쓴 거였는데 그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 이후 이곳은 다양한 공연과 강연장으로 쓰일 예정이다. 유가족과 시민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이 공간이, 권력이 정한 역사를 대체하는 기억의 장이 될 것이란 얘기다. 김 교수는 어머니 몇 분과 글쓰기 공부 계획도 세웠다. “그 어떤 지식인보다 그들의 말에 엄청난 담론이 있어요.”
물론 모든 사람이 365일 세월호만 생각하며 살 순 없는 일이다. 우리 사회가 4월16일 이전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공감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무한경쟁에 휩쓸렸던 내 삶이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지난 토요일, 두 아들과 광화문 광장에 갔다. “이렇게 이기적인 세상에 그렇지 않은 아이로 자식을 키우는 것이 이 투쟁의 연속이라고 봐요… 길게 천천히, 그러나 결코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금요일엔 돌아오렴> 중 4반 건우 어머니 노선자씨의 말)
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김영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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