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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백금세대’와 노후공포 / 김영희

등록 2015-05-10 18:44

중간고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이전 살던 동네 친구들과 만난 고1짜리 작은아들이 보고 온 영화는 <장수상회>. 10대들이 <어벤져스>도 아니고 노인들 얘기라니 ‘칙칙하다’ 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아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이 나서 모두 꺼이꺼이 울었다”며 “또 보고 싶다”고 했다. 중학교 때까지 외가 앞에 살며 엄마 밥 대신 할머니 저녁밥을 먹고, 조퇴해 병원에라도 가면 할아버지가 따라나서던 아들이다. ‘걱정’을 잔소리처럼 느끼며 가끔 짜증 낼 때도 있었지만 밤늦게야 얼굴 내미는 부모보다 조부모에 대한 감정이 훨씬 애틋하리라.

70대 나이에 뒤늦게 스마트폰에 입문한 어머니의 ‘선생님’이 된 것도 작은아들이었다. “나이 드신 분이 스마트폰 배우려면 더 스트레스 받는다”며 그동안 만류해왔던 자식들이 머쓱하게, 작은아들의 진득한 ‘개인 강습’ 통화를 통해 어머니는 이제 가족들에게 매일 카톡 영상과 메시지를 보낼 정도로 스마트폰에 능숙해졌다. 옆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어떠랴. 내 어릴 적 돌아보면, 가끔 찾아뵌 할머니가 맛있는 밥 한끼 해주겠다며 눈에 띄게 약해진 몸을 자리에서 일으키던 그 마음이 아직도 따뜻하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노릇도 마음만으로 하기 힘들어지는 세상이다. 아이의 학력과 장래를 좌우하는 게 조부모의 재력이란 말이 나온 지 오래다. 최근엔 ‘백금세대’ ‘피딩족’ 같은 신조어도 유행한다.

백금세대는 한 투자증권연구소 보고서에 나온 말인데, 올해부터 은퇴 시기에 진입하는 1955~1963년생 1차 베이비부머를 가리킨다. 어떤 세대보다 보유자산(평균 4.3억원)이 많은 이 50대들에, 기존의 ‘실버’ 같은 단어 대신 플래티늄 신용카드처럼 특별한 단어를 붙였다. 보고서는 높은 교육 수준과 강한 지적 욕구까지 갖춘 이들의 소비·문화 트렌드에 주목하며, ‘피딩족’이 가져온 ‘할아버지 경제의 부각’을 변화 중 하나로 꼽았다. 어느 백화점이 ‘손주의 날’ 행사를 하며 소개한 피딩족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Financial) 육아를 즐기며(Enjoy) 활동적이고(Energetic) 헌신적인(Devoted) 50~70대 조부모 세대를 뜻한다고 한다. 이 백화점은 손주와 10만원어치 이상 쇼핑하면 선물을 주는 등의 마케팅을 펼쳤다. 자식 세대의 ‘희망사항’만 끌어모아 억지로 만든 듯한 단어가 조악하지만, 일본에서도 ‘단카이 세대’ 은퇴에 맞춰 ‘손주 비즈니스’ 같은 말이 정착됐으니 기업들의 마케팅 자체를 비판하긴 힘들다.

문제는 이런 용어가 퍼질수록 대다수 사람들의 자괴감 또는 ‘노후 공포’ 또한 커져간다는 점이다. 지난달 피델리티자산운용이 ‘대한민국 은퇴준비지수’를 발표하며 전제로 한 2인 가구의 은퇴 직전 연 소득은 7993만원, 은퇴 뒤 예상생활비는 이의 57% 정도인 4560만원이다. 빈곤층은 차치하고라도 지난해 기준 임금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이 223만1000원(연 2677만원)이니 그 간극은 너무 크다.

허약한 공적연금 체제를 자양분 삼아, 사적 영역이 퍼뜨리는 노후 공포는 야금야금 사람들을 파고든다. 공적 체제 없이도 충분히 여유있는 소수를 제외하면 그 어느 누구도 돈을 번다고 이 공포를 벗어나긴 쉽지 않다. 자본의 욕망은 언제나 사람들에 몇걸음 앞서간다. 그건 젊은 세대에게든 나이 든 세대에게든 마찬가지다.

김영희 문화부장
김영희 문화부장
세대간 연대란 그런 서로의 처지에 대한 공감을 넓히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장수상회>를 보고 ‘꺼이꺼이’ 울었다는 아이들의 마음이 노인 세대에 대한 이해와 공감으로 이어진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리라. 정부가 ‘도적질’ 같은 말을 써가며 세대갈등에 불을 지피는 세상이지만 말이다.

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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