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안녕, 만리동 / 김영희

등록 2015-06-10 18:43수정 2015-06-10 21:06

올해 초 8년여 만에 서울로 이사와 좋은 점이라곤 통근시간이 대폭 줄었다는 것 정도다.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 반 이상이던 출근길이 이제는 걸어 20~30분 남짓이다. 처음엔 6차선 대로를 따라 걸었는데, 차츰 만리동 뒷골목을 누비는 맛이 쏠쏠해졌다.

아파트 옆문으로 나가 손기정체육공원을 가로질러 봉래초교 앞을 지나 왼쪽, 가빠지는 숨을 잠시 참고 언덕을 오르면 다시 환일고 뒷길로 이어지는 길 주변 곳곳에 벽화와 액자들이 즐비하다. 무엇보다 매력은 오래된 골목 자체다. 좁다란 골목이 몇 개씩 나란히 난 곳이 많은데, 그 안쪽 어느 집엔가는 멈춰버린 시계가 낡은 문에 걸려 있어 주변 신축 아파트 공사장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아파트에선 이웃 떠올릴 일이 별로 없지만, 골목에선 다르다. 봄이 오기 전, 깨진 창을 비닐로 대충 막아놓은 집을 지날 때면 춥지 않을까 걱정도 되고 무슨 사연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만리동은 예부터 이름없는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밴 곳이다. 한강을 따라 온 사람들은 마포나루에 짐을 부린 뒤 다시 수레나 지게에 실어 이 높은 고개를 넘어 한양도성으로 향했다. 1970년대부터 들어선 소규모 봉제공장들에선 오늘도 아침부터 미싱 소리가 들린다. 덕수궁 등 유적 가득한 정동, 무기제조 관리 관청이 있던 무교동, 저포전이 있던 저동 등 중구의 ‘유서 깊은’ 다른 동네와 달리, ‘광복 뒤 만리현 이름을 땄다’는 게 이름 유래의 전부다.(학자 최만리가 살았다는 설도 있다.)

이곳에 ‘명물’이 생겼다. 언덕 꼭대기에서 늘 곁눈질하던 만리동예술인협동조합주택, 이름하여 막쿱에 예술인 29가구가 둥지를 튼 것이다.

최근 이들은 4~5층짜리 3개 동 주택 곳곳에 작품을 전시하며 공개하는 집들이 행사를 일주일 넘게 열었다. 공연·미술·영화·성악·문학 등 워낙 다양한 분야가 모여 있다 보니 판이 커졌다. 지난 주말, 바로 앞 공원에서 바람이 산들 불어오는 1층 공용공간에서 주민들을 맞던 조광익(회화)씨는 “계속 아이디어가 불어나 30일 오프닝쇼 땐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합창도 하고 오페라와 연극까지 하게 됐다”고 전했다. 행위예술가 야마가타 트윅스터가 이 동 저 동 뛰어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는 마지막 순서엔 주민들이 다 같이 몰려다녔다고 한다. 서울시가 기획하고 에스에이치(SH)공사가 분양한 이곳은 최장 20년 거주가 가능한 예술인 전용 전국 첫 임대주택. 조합원들은 주택 관리를 맡는다. 장인선(회화·설치)씨는 “설치작가들이 많아 웬만한 전기는 다 만진다”며 웃었다.

31~60살, 1~5인 가구 등 형태도 다양하다. 집값 걱정 없이 창작할 수 있는 행복을 공유했다지만, 생면부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게 어렵진 않을까? 분양공고 뒤 2년간 많이 부대낀 게 자산이다. 김경표(건축) 이사장은 “민주주의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웃음) 토론 방법도 몰랐고 몇시간 토론해도 결론이 안 나거나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한달에 한번 ‘비폭력 대화’ 교육까지 받았다. 이들은 이제 협동조합으로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일이면서 동네에 문화활력을 불어넣을 방법을 고민중이다. 주민들과 함께할 워크숍, 공용공간을 이용한 공연 등도 방안 중 하나다.

김영희 문화부장
김영희 문화부장
지자체마다 유적 복원이나 문화 랜드마크 건립 움직임이 요란하다. 하지만 궁전이나 박물관, 공연장이 문화의 전부는 아니다.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오랜 시간 전해오는 무형의 것, 이질적인 것들이 부딪치며 빚는 현재의 역동성, 이 또한 문화다. 문래동 철공단지에 들어선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이 주민들 환영을 받게 된 것도, 문화가 고상한 곳에 ‘모셔놓고’ 감상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동네에서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내가 사는 동네가 좋아질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김영희 문화부장 dor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1.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북한군 포로의 얼굴 [코즈모폴리턴] 2.

북한군 포로의 얼굴 [코즈모폴리턴]

트럼프는 이겼지만 윤석열은 질 것이다 3.

트럼프는 이겼지만 윤석열은 질 것이다

민주화 시대의 첫 반역자, 윤석열 4.

민주화 시대의 첫 반역자, 윤석열

[사설] 최상목, 내란 특검법 또 거부권…국회 재의결해 전모 밝혀야 5.

[사설] 최상목, 내란 특검법 또 거부권…국회 재의결해 전모 밝혀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