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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기’의 씁쓸함 / 이종규

등록 2015-07-29 18:30

요즘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말이 유행이다. 한 카드회사 텔레비전 광고에 나온 대사인데, 온라인에선 온갖 패러디물이 등장하고 직장인 사이에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끝없는 일에 지친 직장인들의 ‘탈출 욕구’를 잘 읽어냈기 때문이리라.

‘아무것도 안 하기’는 모든 직장인들의 로망이다. 일에 치여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하루쯤은 나무늘보처럼 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다. 방바닥에 착 들러붙어 하루 종일 꼼짝도 안 하고 음악이나 들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잦은 야근과 회식, 성과 스트레스 탓에 직장에서 에너지를 다 쏟아붓다 보니 휴일이라고 해서 여가를 즐길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하다. ‘번아웃 증후군’(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으로 인해 무기력증에 빠지는 증상)이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85%가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다는 방송사 조사 결과도 있다. ‘과로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삶이 일에 저당잡혀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는 차고 넘친다. 우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장시간 노동’ 국가다. 연간 평균 노동시간(2013년)이 2163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두번째로 길다. 1위인 멕시코(2237시간)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오이시디 평균(1770시간)과 견주면 393시간이나 많다. 전체 임금노동자 1743만여명의 46%인 882만여명이 오후 7시 전엔 퇴근을 못하고, 9시 넘어서 퇴근하는 사람도 15%에 이른다.(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분석) 법적으로 보장된 연차휴가를 모두 쓰는 직장인은 22.4%에 그치는 반면, 절반도 쓰지 못하는 이들이 33.4%나 된다.(고용노동부 ‘2014년 일하는 방식과 문화에 대한 인식조사 보고서’) 이처럼 오래 일하고 덜 쉬다 보니 국민의 81.3%가 ‘일상이 피곤하다’고 느낀다.(통계청 ‘2014년 생활시간조사’)

노동시간과 여가 문제에 천착해온 사회학자 김영선씨는 <과로사회>에서 “우리는 장시간 노동이라는 돼지우리에 갇혀 있다”고 일갈한다. 너무 오래 있다 보니 악취가 악취인 것도 모르고, 너무 익숙해진 탓에 악취를 맡더라도 얼마나 고약한지 표현하지 못하는 저인지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의 건강은 물론 사랑, 육아, 연대, 공동체 참여 등 일상적인 ‘관계’를 망가뜨리는 ‘국민병’이므로, 그 예속에서 벗어나야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새겨들을 만하다.

휴가라도 제대로 보내면 좋으련만, ‘과로사회’는 휴가의 질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평소 일에 지쳐 있는데다 휴가도 짧다 보니 바캉스마저 또 다른 일로 여겨진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피서지를 돌아다니는 것도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한 시장조사 전문기업의 최근 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51.7%)이 ‘여름휴가 때 여행을 가지 않아도 좋다’고 답했다. 집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뜻의 ‘홈케이션’(Home과 Vacation의 합성어)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 그런 휴가는 소진된 기력을 회복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문화로서의 여가와는 거리가 멀다.

이종규 사회2부장
이종규 사회2부장
김영선씨는 <과로사회>에 <게으를 수 있는 권리>(폴 라파르그)의 내용 중 몇 구절을 옮겨 놨는데, 휴가철을 맞아 음미해볼 만하다. “우리는 혼자 있을 시간이, 타인과 관계를 맺을 시간이, 창조적인 일을 할 시간이, 즐거움을 주체적으로 즐길 시간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그저 근육과 감각을 움직일 시간이 필요하다.”

이종규 사회2부장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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