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하다. 경쟁력이 없으면 죽으라는 식의 주장이 거침없이 터져나온다.
지난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의 후속 대책으로 여야정협의체가 ‘농어촌 상생협력기금’을 내놓자 대다수 언론들이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기업들의 팔을 비틀어 삥을 뜯어가는 준조세’ ‘조폭 문화’ ‘세계가 웃을 준조세’ ‘여야정 협잡’ ‘또 퍼주기’ ‘사회주의적 발상’ 등등….
피해가 불을 보듯 뻔한데도 ‘국익’이라는 명분에 밀려 자유무역협정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농어민들로서는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 물밀듯이 밀려들어올 중국산 농수산물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일 텐데 졸지에 염치없는 사람들로 몰렸다.
더 기막힌 일은 국정을 책임져야 할 여당의 태도다. 합의문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식언을 쏟아낸다. 언론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자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농어민들을 도와주려고 했는데 과도했다면 조율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1년에 1000억원씩 10년간 1조원을 조성하기로 한 기금의 규모를 줄일 수 있다는 얘기다. 김무성 대표는 한발 더 나아갔다. “농어촌 상생기금이 기업에 준조세가 되고 재정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익과 국정을 최우선으로 둬야 하는데 정치적 입장이 우선순위여서 아쉬움이 든다.” 국익의 범위에 농어민의 이익은 들어 있지 않고 국정의 우선순위에서 농어업은 밀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로 들린다.
자유무역협정의 최대 수혜자는 대기업이고 최대 피해자는 농어민이다. 정부가 내놓은 전망을 보면, 한-중 자유무역협정으로 향후 10년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은 0.96% 증가한다. 그러나 분야별로 살펴보면, 서비스업과 제조업은 각각 1.56%와 0.92% 증가하지만 농어업은 0.84% 감소한다. 수출만 놓고 보면, 내년 한해에만 13억5천만달러(약 1조6천억원) 늘어난다고 한다. 반면 농업은 생산액이 연평균 77억원, 수산업은 104억원 줄어든다고 한다. 농어민단체들은 피해액이 터무니없이 축소됐다고 반박한다. 이처럼 자유무역협정은 ‘국익 증대’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지만, 당사자 간에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갈린다. 어려운 경제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득을 보는 쪽이 피해를 입는 쪽을 돕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2004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을 시작으로 우리나라는 그동안 53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이 중 50개가 이미 발효됐다. 세계 3대 경제권인 미국·중국·유럽연합과 모두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지난 10여년간 농어업의 희생을 담보로 수출 대기업들을 지원한 것이다. 그래도 이전 자유무역협정 때는 지금처럼 막가자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농어민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걱정했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한때 우리 사회의 화두였던 ‘상생의 정신’이 언젠가부터 사라져버렸다. 외환위기 이후 소득 불평등과 이로 인한 양극화를 더는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 속에서 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비록 결과는 신통치 않았지만, 양극화 해소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주요 국정 과제였다. 이명박 정부도 적어도 겉으로는 ‘따뜻한 시장경제’를 내세웠고 동반성장위원회와 대·중소기업협력재단을 만들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2012년 대선 때는 상생을 외치며 경제민주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웠다. 경제민주화는 박 대통령의 당선에 톡톡히 기여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경제민주화는 실종됐고 상생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승자독식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안재승 경제 에디터 jsahn@hani.co.kr
안재승 경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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