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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공짜 밥이 어딨냐? / 권혁철

등록 2016-05-15 19:39수정 2016-07-28 16:32

26년 전 육군 논산훈련소 훈련병 시절, 돼지가 장화를 신고 후다닥 지나간 듯한 돼지된장찌개로 아침밥을 먹고 나면 오전 8시께 ‘빰빠빰빠~’ 훈련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려퍼졌다. 훈련병의 고된 하루가 또 시작된 것이다. 당시 훈련소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은 이 나팔 운율에 맞춰 “공짜 밥이 어딨냐~ ××× 쳐봐라~”라는 노래를 부르며 훈련병들을 놀리곤 했다.

제대한 뒤 까마득히 잊었던 “공짜 밥이 어딨냐~”는 노래가 20여년 만에 갑자기 생각났다. ‘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이란 5월12일치 <조선일보> 1면 기사를 읽다가였다.

5월9일 국민권익위원회가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까지 제한한 이른바 김영란법 시행령을 입법예고했다. <조선일보>는 김영란법 때문에 명절 선물이 크게 줄어 농어민들의 시름이 커졌고 식당 주인들도 초비상이라고 전했다. 이 신문은 현실을 모르는 탁상행정으로 내수 위축을 촉발할 것이란 관련 업계의 주장을 비중있게 전했다. 농협중앙회는 12일 낸 성명에서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명절 때 정을 나누는 미풍양속은 없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진 않지만 내수 위축을 걱정하는 주장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한우의 한숨, 굴비의 비명’ 기사는 각종 사례를 효과적으로 배치했고 그래픽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일목요연하게 내용을 전달했다. 하지만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며 비참해졌다. ‘한우나 굴비는 (대부분 공무원과 기자 등에게) 선물용으로 소비된다’는 주장은 대한민국이 뇌물공화국이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난 뒤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쓴 듯 불쾌했다. 이 기사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기자집단 전체에 ‘뇌물기자’란 꼬리표를 달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에 붙은 누리꾼 댓글을 보면 ‘언론이 앞장서 부정부패를 조장하고 있다’거나 ‘기자들이 지들이 받아먹을 게 없어지니깐 저러는 거임’ 같은 비판적이거나 냉소적인 내용이 많았다. 나는 가뜩이나 ‘기레기’ 소리를 듣는 기자들의 신뢰 상실에 가속도가 붙을까봐 걱정이다.

내수 위축을 걱정하는 기사에 독자들은 왜 ‘부정부패를 옹호한다’는 날선 반응을 보일까? 나는 기사 눈높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명절 때 한우와 굴비를 주고받아왔던 이들의 한숨만 듣고, 2천원짜리 컵밥을 먹는 국민들의 비명은 못 들었기 때문이다. 한 마리에 2만원이 넘는 굴비, 25만원짜리 한우 등심을 선물로 주고받는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몇이나 될까.

김영란법이 미풍양속을 없애 세상을 팍팍하게 만든다고 걱정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나는 고위공직자로 퇴직한 사람들에게 퇴직 뒤 소감을 묻곤 한다. 대부분 “시원섭섭하다”고 한다. 나는 ‘무엇이 제일 섭섭하냐’고 다시 물어본다. 퇴직 다음날부터 기사 딸린 관용차가 사라지고 명절 때 들어오던 선물이 뚝 끊길 때란 답변이 많았다. 그리고 퇴직 공직자들은 “명절 선물은 사람이 아니라 자리를 보고 준다”고 말한다.

권혁철 지역에디터
권혁철 지역에디터
내가 보기에도 김영란법 내용 가운데 동의하지 않거나 걱정스러운 대목들이 있다. 하지만 학연·지연·혈연 등 사적인 네트워크가 인사, 인허가 등 공적 업무에 개입하는 것을 막는다는 김영란법의 취지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김영란법이 아니다. 내 돈 내고 밥 먹기, 과도한 선물 안 주고 안 받기 같은 상식을 법으로 강제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김영란법으로 팍팍해질 미래가 아니라 끈적끈적한 현실이 문제다. ‘공짜 밥이 어딨냐?’ 26년 전 논산훈련소 훈련병들도 알던 이 사실을 대한민국 오피니언 리더라는 공무원들과 기자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권혁철 지역에디터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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