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 고위관계자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부실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솔직한 고백을 했다. 그는 조선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우리 조선산업이 어떻게 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답답해서 담당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 물어봤더니 거기도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민간 컨설팅업체에 조선산업 진단과 발전 방향에 대한 용역을 맡겼다고 털어놨다.
솔직한 건 좋으나 듣는 사람들도 당혹스러웠다. 수만명의 일자리가 걸려 있는 국가 주력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구조조정의 사령탑인 금융위원회도 모르고, 담당 부처도 모른다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조선업 위기의 징후가 나타난 지 몇년이 지났는데도 이 지경이라는 것은 부끄러운 수준을 넘어 책임을 물어야 할 사안이다. 개발연대에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주도했다는 찬사를 받았던 경제관료들이 이제 자리보전과 퇴직 뒤 낙하산 취업이라는 ‘과실 따먹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듯하다. 오죽하면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까지 나서 구조조정의 대원칙은 물론이고 컨트롤타워도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을까.
산업이 고도화·첨단화하면서 정부가 과거처럼 개별 기업 차원의 구조조정 밑그림을 그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시장화·글로벌화한 환경에서 개별 기업의 미래에 정부가 직접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주력산업을 기업들에만 맡겨놓고 발전 방향의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산업정책을 다시 중시하기 시작한 세계적인 추세와도 맞지 않는다. 1980년대 이후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 영향으로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려 했던 선진국들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방향을 바꿨다. 선진국들은 위기 이후 제조업이 국가경쟁력과 고용 창출·유지에 핵심적이라는 점을 새삼 깨닫고 국가 차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은 2009년 파산한 제너럴모터스(GM)에 약 60조원의 공적자금을 쏟아부어 이를 회생시켰다. 고용 등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다. 개별 기업 지원을 넘어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전략적 산업정책도 편다. 미국이 주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아·태 12개국을 묶어 중국의 경제력 팽창을 견제하면서 미국 기업들의 활로를 모색하려는 전략이다. ‘트럼프 현상’으로 드러난 미국인의 국수주의화는 올해 미 대선에서 누가 이기든 차기 행정부의 통상정책에 반영될 것이 분명하다.
독일은 금융위기 와중에도 제조업 선도국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노사 등 이해관계자들의 협의가 중시되는 나라이지만, 필요하면 연방정부도 과감한 산업정책을 편다. 2020년까지 전기자동차를 100만대 보급하고, 2022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겠다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결단은 곧 다가올 친환경적 산업 패러다임에서 시장을 선점하려는 전략이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도 ‘일본재흥전략’이라는 적극적 산업정책을 통해 경제 체질 개선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우리도 이제 부실기업 구조조정 차원을 넘어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그랜드플랜’을 짜야 할 때가 됐다. 대량생산을 위한 과감한 설비투자와 경영 효율화에 기반한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경쟁력은 중국의 추격에 위태로운 처지다. 조선·해운뿐만 아니라 자동차·철강·휴대전화 등 주력산업 대부분이 마찬가지다. 새판을 짜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이를 진두지휘할 컨트롤타워의 재구성이 필수적이다. 부실기업 처리하는 데 급급한 현재의 금융위 주도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산업과 고용, 사회안전망 등 종합 설계도를 그려 실행에 나서기 위해선 경제부총리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
박현 경제 에디터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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