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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덕기자 덕질기] 미미인형과 ‘여성 대통령’

등록 2016-08-10 18:05수정 2016-08-10 19:26

황금비
국제뉴스팀 기자

2000년. 인류 역사 1천년 만에 앞자리가 바뀌었던 그해, 열살이던 나는 생애 처음으로 미미인형을 선물받았다. 인형 포장지를 뜯으며 좋아하던 나에게 할머니는 “다 큰 애가 인형을 가지고 논다”며 타박을 줬다. 그때부터였을까. 미미인형에 대한 과도한 애착이 시작됐을 때가.

인형계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던 ‘쥬쥬’와 ‘미미’ 중에서도 나는 줄곧 미미파였다. 금빛 곱슬머리에 샤랄라한 공주풍의 인형이 쥬쥬였다면, 갈색의 생머리에 청바지와 앞치마도 잘 어울렸던 미미는 친근하고 수줍은 콘셉트의 인형이었다. 듣고 있으면 귀가 간지러워지는 ‘쥬-쥬-’에 비해, ‘미-미-’라는 발음은 듣기에도 부담이 없다. 큰 눈망울에 오뚝한 콧날, 팔등신을 넘어서는 몸매에 부드러운 고동색 머릿결까지. 사람을 본떠 만들어진 미미는 사람을 닮지 않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미미는 가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미미 인형들.
아름다운 미미 인형들.
미미 인형을 처음 갖기 전까진 친구들의 인형을 빌려 놀았다. 나는 인형을 갖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치밀한 계산을 토대로 언니가 있는 친구들을 공략했고, 그들에게서 방치된 미미를 빌렸다.

초등학생 때부터 성역할을 체화해 나갔던 대한민국의 여자 어린이가 인형놀이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계급은 바로 ‘대통령의 딸’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대통령이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보면 여자는 대통령이 될 수 없으니까’라는 단순한 사고구조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이 논리에 따르면 빌린 미미로 놀이에 참여했던 난 10살이 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대통령의 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2000년. 인류 역사 1천년 만에 앞자리가 바뀌었던 그해, 대한민국에서는 ‘창의적 인간’을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제시하는 ‘제7차 교육과정’이 시행됐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이승복기념관으로 체험학습을 가서 반공 영화를 봤던 나는 이듬해 도덕 수업시간에 ‘옥류관 평양냉면이 얼마나 맛있을지’를 상상했다. 나름 격변의 시대였음에도, 그로부터 여성 대통령이 등장했던 것은 강산이 한 번 더 변하고도 2년이 지나서였다. 대한민국에도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줄 알았더라면 인형놀이에서도 ‘대통령의 딸’이 아니라 그냥 대통령을 할걸 그랬다.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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