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에디터 욕부터 튀어나왔다. “병사? 미친 거 아냐? 어떤 ××가 쓴 거야?” 의학 지식이 없어도 우선 상식과 거리가 멀었다. 선명한 사인을 흐릿하게 만들려는 자가 누군지 궁금했다. 서울대병원 전공의(레지던트) 권아무개씨라고 했다. 누구의 지시로, 누구와 공모해 백남기 농민의 부검 근거를 지어냈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유족 등을 통해 전해진 그의 ‘활약상’을 들은 뒤엔 달라졌다. 권씨의 ‘소소한 저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문제의 사망진단서를 작성하면서부터 흔적을 남기기 시작했다. 병사로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는 전화를 유족들 앞에서 한다. 통화 건너편 당사자에게 “병사라고요?”를, 다짐받듯 두세 번 되물었다. 그리고 유족 백도라지씨에게 “내 이름으로 나가기는 하지만 내 권한이 없다”고 못박는다. 권씨는 더 분명한 흔적을 진료기록에 남겼다. 사망진단서는 지시받은 대로 병사로 기록하면서도, 다른 서류인 진료기록에 ‘신찬수(서울대 병원) 부원장과 백선하 신경외과 교수와 협의’했다고 적어놓는다. 환자의 상태, 어떤 치료와 처방을 했는지를 남기는 진료기록에 누구와 협의해 사망진단서를 작성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고 한다. 사망진단서와 부검 영장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진 뒤 잠적한 권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을 인용해 메시지를 남긴다. 진실을 좇으라고(Only try to realize the truth). 의료인의 전문지식과 양심을 걸고 부당한 지시에 저항했어야 했다고, 혹은 자신만 책임을 면하려고 소극적인 방법을 택한 것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권씨가 남긴 흔적은, 당장 모든 전모를 밝힐 정도는 아니어도 언젠가 기록을 바탕으로 진실을 추적할 소중한 단서가 됐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유가족과의 협의라는 ‘제한’이 달린 부검영장을 발부한 서울중앙지법 성아무개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마냥 비난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기각이라는 명징한 결정을 통해 부검을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지위에 있었던 만큼 오히려 분쟁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압수수색검증의 방법과 절차에 관한 제한’이라는 이례적인 방식의 영장으로 여러 해석의 여지를 남겼고, 10월5일 국회 국정감사를 통해 “특정한 제한 범위 내에서 인용하고 그 밖의 경우 기각한다는 취지”(강형주 서울중앙지법원장), 즉 영장의 제한사항은 권고가 아닌 의무규정이라고 밝히게 함으로써 잔인한 정권의 거침없는 폭주에 제동을 거는 데에 일조했다. 거스르기 힘든 정권의 압력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다면, 저들이 제 맘대로 하지는 못하도록 한걸음 비켜서 딴죽을 거는 소소한 저항도, 소심한 저항도 지금은 소중하다. 경찰에 쫓기는 흉기를 든 강도를 정면에서 막아설 수 없다면 살짝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든 것을 걸고 맞서 싸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순간의 결정이 자신의 미래뿐 아니라 가족의 생계까지 위태롭게 만들 땐 더욱 그럴 것이다. 말로만 목숨을 걸고 곡기를 며칠 끊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불의에 맞섰던 내부고발자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해직돼 지금도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 언론인들의 고된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난 주말부터 우리나라 최고 실세라는 최순실을 기억하자는 놀이가 페이스북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해시태그(#)를 달아 그를 꼭꼭 숨기려는 자들에게 보란 듯이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백남기도, 세월호도 잊지 말자며 태그가 늘어나고 있다. 잊지 않는 것, 기억하는 것도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저항이다.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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