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에디터 2007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선주자였을 때다. 그의 미국 출장에 일부 기자들이 동행했다. 워싱턴, 보스턴, 로스앤젤레스를 순회하는 1주일가량의 출장이 끝날 무렵, 기자들은 간담회를 예상했다. 이뤄지지 않았다. 일부 기자들이 귀국 전날 밤 동행했던 당시 김무성 의원 방을 찾아가 항의했다. 김 의원은 “미안하다”며 기자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다 박 대통령에 대해 말 못할 불만을 숨기지 못한 채, “그냥 박 대표 방에 들이닥쳐라. 간담회, 지금 하면 될 것 아니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그러자 일부 기자들이 진짜로 방문을 두드렸다. 일부는 “박 대표님~” 하며 소리를 질렀다. 20분쯤 방문을 두드렸으나 일절 반응이 없었다. 동행했던 일부 의원들이 놀란 눈으로 달려나와 기자들을 만류해 ‘거사’는 불발됐다. 밤 12시 무렵이었다. 동행 기자들과 동선을 달리해 출장 기간 내내 마주치기도 힘들었던 박 ‘전 대표’를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대표님, 어제 왜 문 열어주시지 않으셨어요”라고 볼멘소리를 하자, “그러셨어요? 저는 잠들면 아주 깊은 곳으로 떨어지듯 합니다. 전혀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요.” 상냥했다. 전날 ‘무례’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줬다. 대꾸는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거짓말을 참 잘하시는구나.’ 당시 박 대통령의 브랜드네이밍은 ‘원칙과 신뢰’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도 다른 말을 했다. 당시 박 후보가 “지지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말했지만, 바로 옆에 있던 의원들은 “박 대표가 지지율에 굉장히 민감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에도 한국갤럽 조사에서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지자, 그날 밤 부랴부랴 ‘문고리 3인방’을 잘랐다. 당시 출장에서 하버드대 강연도 했다. 기조연설 뒤 대학생들의 질문이 있었다. 영어 통역이 있는데도 박 대통령은 매번, ‘이런 걸 물어보신 거죠’라고 한국말로 한마디 한 뒤 한국어 통역을 들었다. 한국말 못하는 질문자에게 영어로 묻는 것도 아니고, 한국어 통역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말은 누구 들으라고 한 말이었을까? ‘나, 영어 리스닝 돼요’라고 웅변하는 것 같았다. 그 한마디도 단어 하나 언급하는 수준이다. 준비해 온 강연은 영어로 했고, 현장 답변은 한국어로 했다. 그때부터 나는 박 대통령이 ‘영어에 능통하다’거나, ‘1979년 지미 카터 대통령 방한 때 통역을 했다’든지 하는 등의 말을 믿지 않게 됐다. 일상회화 수준 정도일 것이다. 실제보다 좀더 낫게 보이고픈 학예회 뽐내기 수준의 ‘순수한 마음’(?)이 ‘꼼꼼하게 거짓말을 챙기게’ 됐을 것이고,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토양이 됐을 것이다. 현 게이트의 가장 큰 위기는 ‘신뢰’의 붕괴다. 그래서 어떤 방도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마치 도망가면서 위기 때마다 호리병 던지는 동화 속 아이처럼 ‘개헌’, ‘개각’ 등 먹히지도 않는 카드를 자꾸 던진다. 지금은 1970년대가 아니고, 사람들은 박 대통령은 물론, 박 대통령이 조언을 구하는 그들보다 훨씬 똑똑하다. 미국 대통령 가운데 비슷한 인물을 찾자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리처드 닉슨이 있다. 아이젠하워의 가장 큰 무기는 ‘100만불짜리 미소’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 사람들은 그가 ‘미소’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이젠하워의 임기말은 상·하원 모두 여소야대, 비서실장 부패사건 연루 등으로 얼룩졌다. 임기는 마쳤다. 닉슨은 술수에 능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애초 하야할 정도는 아니었다. 계속된 ‘거짓말’이 그를 ‘하야’로 몰아붙였다. 내가 본 박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의 머리에 닉슨의 가슴을 지닌 인물이다.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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