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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보수 후보 반기문’이라는 부조리 / 박용현

등록 2017-01-11 18:14수정 2017-01-11 19:05

박용현
정치에디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12·28 합의를 ‘환영’했던 발언이 비판받고 있다. 이 발언 자체도 문제적이지만, 그 맥락이 더 고약하다.

2015년 11월14일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에 쓰러졌다. 세계 언론이 그 무자비한 시위진압에 주목했다. 유엔은 이후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을 한국에 파견해 조사까지 벌였다. 당시에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교과서 폭주도 한창이었다. 정치권에선 반기문 총장이 저지에 나서달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청소년들도 유엔에 청원서를 냈다. 유엔은 2013년 총회에서 ‘국정교과서가 유엔 규약과 민주주의에 역행한다’는 보고서를 채택했기 때문이다. 유엔 사무총장이라면 이 정도만으로도 그의 고국이 비뚤어진 리더십에 망가져가고 있음을 알아챘을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도 독재 회귀의 징후를 뚜렷이 읽어내던 시기였다. 12·28 합의는 거기에 더해진 또 하나의 폭거였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 맞은 2016년 벽두에 반기문 총장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12·28 합의는 “올바른 용단”이라며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이라고 했다. 유엔의 원칙을 거스른 무자비한 시위진압과 국정교과서 문제에는 침묵했다. 그러니 저 발언은 무원칙한 아첨이라고 할밖에.(이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도 12·28 합의를 비판했다.)

유엔 사무총장은 누구보다 국제사회의 원칙과 기준에 대해 잘 알고(혹은 알아야 하고) 그 보편적 실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반 총장이 유엔을 이끈 10년간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국제기준에 다가가기는커녕 더욱 뒤처지는 한국의 현실을 그도 목도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정권들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오히려 밀착하려 했다면 그것은 ‘세계 대통령’의 위엄을 벗어버린 일개 정치꾼의 행보일 뿐이다.

사실 유엔 사무총장 출신이 ‘보수’의 환호를 받는 대선주자가 된 현실 자체가 부조리다. 유엔을 이끌었던 지도자라면 국제기준의 눈높이로 한국 사회의 퇴행을 성찰할 테고, 그렇다면 국내적 시각에 머물러 있는 여느 정치인보다 훨씬 진보적이 되는 게 자연스런 귀결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방한 뒤 유엔 인권이사회에 보고한 내용을 보자. 그는 한국 정부의 과도한 시위진압을 비판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전교조 인정,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죄) 폐지, 삼성 등 기업의 노조활동 보장 등을 권고했다. 이밖에도 유엔은 사형제 폐지와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을 요구해왔다. 정부가 동성애자 등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발언을 적극 방지하고, 학교에서 다양한 성적 정체성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라는 권고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질겁할 주제들이다. 하지만 민주주의, 인권, 표현의 자유 등 유엔이 지향하는 가치를 제대로 밀고 나갈 때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주제들이며, 유엔은 이미 그 해결책을 보편적 국제규범으로 세워놓았다. 이제 고국에 돌아온 반 전 총장은 이들 규범을 국내에서 실현하는 데 앞장설까, 아니면 정부가 그래 왔듯 유엔의 기준과 권고는 대충 무시해도 된다는 입장을 취할까.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그의 행보는 후자 쪽을 가리키고 있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이 나라의 불행이자 반기문 개인의 추락이다. 자신의 유일한 정치적 자산인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제거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면 대선 가도에서 그를 규정할 정체성은 ‘73살의 전직 외교관’ 말고 뭐가 남을까.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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