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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밥값 못한 자괴감 / 권혁철

등록 2017-05-07 18:34수정 2017-05-07 21:25

권혁철

지역에디터

아주 하찮은 금액을 ‘껌값’이라고 말한다. 나는 껌을 거의 씹지 않아 껌값을 잘 모른다.

지난주 껌값이 궁금해졌다. 이종혁 전농 정책부장이 “농민단체들은 밥 한 공기가 껌 한 통 값보다 싼 쌀값을 정상화하는 것이 농정개혁의 시험대라고 여기고 있다”고 말한 기사(<한겨레> 5월1일치 1면 ‘농민 없는 대선’)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요 후보의 대선 공약을 검증하는 기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훌륭한 기사가 많았지만, 나는 이 기사가 ‘대선 과정에서 투명인간 취급받던 농업문제를 제기했다’는 측면에서 돋보였다고 생각한다.

이 기사는 내가 데스킹(기사 사실관계 확인하고 수정 보완하는 작업)했다. 당시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껌 한 통 값이 쌀값보다 비싸다는 이 주장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시 기사 마감 시간이 이미 지나갔고 이 기사를 쓴 안관옥 기자가 평소 꼼꼼하게 취재해서 믿고 넘어갔다.

기사를 내보낸 뒤 ‘팩트체크를 못하고 기사를 내보냈다’는 찜찜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늦었지만 그제 토요일 껌값을 확인하려고 동네 가게에 들렀다. 동네 가게 소맷값 기준으로 껌 한 통 최저가는 400원이었다.

밥 한 공기의 쌀값은 얼마일까. 밥 한 공기 짓는 데 쌀 100g이 들어간다고 한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발표한 지난주 쌀 20㎏ 한 포대 소맷값은 3만6189원이다. 이를 기준으로 계산해보니 밥 한 공기 쌀값은 181원이다. 늦은 팩트체크지만 ‘밥 한 공기가 껌 한 통 값보다 싸다’는 농민단체의 주장은 사실이다.

지난달 농민단체들은 대선 후보들에게 ‘밥 한 공기 쌀값 300원’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식당에서 1000원을 받는 밥 한 공기를 기준으로 농민이 아닌 사람들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한 것이다.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하듯 ‘밥 한 공기 300원’으로 농민의 최저 생계와 자존심을 지켜달라는 요구였다.

구체적으로 ‘밥 한 공기(쌀 100g) 300원’을 보장하면, 쌀 1㎏에 3000원, 쌀 20㎏ 한 포대에 6만원, 80㎏ 한 가마에 24만원이다. ‘밥 한 공기 300원’을 선뜻 공약으로 받아들인 주요 후보는 없다. 이번 대선 기간 주요 현안에서 농업, 농민, 농촌이 사라졌다. 주요 정당은 농민 수가 250만명으로 줄어들자, 더 이상 농민이 선거에서 ‘표’가 안 된다고 외면했다. 그나마 심상정 정의당 후보(농민 기본소득 20만원 등), 김선동 민중연합당 후보(밥쌀 수입 전면금지, 우선지급금 강제환수 원천무효 등)의 농업 공약이 눈에 띈다.

경쟁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대외 경쟁력이 떨어지는 국내 쌀 산업에 대한 과잉보호가 생산 과잉을 불러 쌀값 폭락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들은 정부의 쌀값 보장 정책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주장한다.

농업정책이 대선에서 푸대접받은 데는 나를 포함한 기자들의 책임도 있다. 재작년 11월 민중총궐기 때 ‘쌀값 보장’을 요구하다 숨진 백남기 농민의 희생 등이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이어졌다. 기자들은 백남기 농민 투병·사망·장례 상황을 중계방송하는 데 그쳤고 ‘쌀값 보장’ 요구에 주목하지 않았다.

대선 과정에서 서울 종합일간지로는 드물게 <한겨레>가 5월1일치에 1면 머리기사로 ‘농민 없는 대선’ 기사를 쓴 것은 편집국장의 문제의식과 광주·전남 지역 기자로 일하며 농업·농촌·농민을 꾸준히 취재해온 안관옥 기자의 노력 덕분이다. 에디터로서 내 밥값을 못했다는 자괴감이 든다. 9일 이후 새 대통령의 농업정책을 잘 살피고 따져 꼼꼼하게 보도해서 밥값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nu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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