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에디터 하필 이명박 정부 때 영화를 담당했다. 한국 영화는 거의 망해가는 수준이었다. 영화가 좋아 영화 담당 기자가 됐는데 볼만한 영화는 별로 없었고, 사건성 취재거리가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볼만한 영화가 만들어지는 걸 누군가 막고 있었다. 강풀 원작의 만화 <26년>을 각색한 영화 <29년>이 그런 경우였다. 각색과 캐스팅을 마치고 곧 촬영을 시작한다고 보도자료까지 냈는데 주요 투자자가 갑자기 투자를 철회했다. 영화계 용어로 ‘영화가 엎어진 것’이다. 투자 철회의 내막을 취재하기 위해 사건기자처럼 다녔다. 문제의 투자자는 민영화된 (하지만 여전히 정부가 대표이사를 결정하는) 한국의 공기업과 일본의 투자사가 합작해 만든 펀드였다. 누가 입김을 넣었을지 짐작이 갔다. 어렵게 만난 제작사 대표도 그러리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정권 초기라 서슬이 퍼럴 때였고, 증거나 증언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기사를 쓰지 못했다. 영화는 이명박 정권 말기인 2012년, 만화 원제인 <26년>으로 마침내 개봉했다. 국민들이 직접 투자하는 크라우드펀딩 형식이었고, 감독과 배우가 모두 바뀐 상태였다. 원래 이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던 남녀 주연 배우들(류승범, 김아중)은 한동안 스크린에서 볼 수 없었다. 감독(이해영) 역시 별다른 후속작이 없었다. 한창 주목받던 감독과 배우들이었는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같은 제작사에서 준비하던 <괴물 2>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렸다. 한강이 아니라 청계천에서 괴물이 나온다는 설정 때문이었다는 후문이 돌았다. 요즘 터져 나오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의 문화계 및 방송 장악을 위한 공작 활동을 보노라면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주로 특정인을 국가 지원에서 배제하는 데 사용됐지만 이명박 정부는 훨씬 공세적이었다. 사찰을 통해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세무조사 등으로 경제적 타격을 줬다. 연예인들의 경우 방송 출연을 막거나 프로그램 자체를 폐지해 밥줄을 끊었다. 가장 심각한 행위는 인터넷 댓글이나 합성사진까지 동원해 인격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육체적 고문은 몸을 파괴하지만, 블랙리스트와 댓글 공작은 영혼을 파괴한다. “죽어라 죽어라” 하는 댓글을 보며 실제로 자살을 기도했다는 김규리(김민선)씨의 사례는 이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절감하게 한다. 국정원 개혁위가 최근 발표한 보도자료를 보면, 이명박 청와대와 국정원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였다. 민정수석과 홍보수석, 기획관리비서관 등이 ‘좌파 성향 감독들의 이념편향적 영화 제작 실태’ 같은 자료를 주문하면, 국정원은 “VIP 일일보고”나 “BH 요청자료” 등의 제목으로 청와대에 보고했다. 국정원을 정권보위의 첨병으로 활용한 이명박 정부의 버릇은 2012년 대선 개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불법행위가 탄로 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정권 재창출은 필수적이었기에 필사적으로 댓글 공작에 달려들었다. 보고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이 전 대통령을 처벌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 전직 대통령을 둘씩이나 감옥에 보내는 게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울 것이란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이 벌인 짓은 국가에 대한 믿음을 파괴한 반국가적 범죄로서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엄히 다스려야 한다. 특히, 단죄되지 않은 범죄가 더 큰 범죄를 불렀다는 점에서 사후 처리 과정을 역사에 똑똑히 남겨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알베르 카뮈의 말로 결론을 대신한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 공화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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