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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그래서 스웨덴은 행복한가 / 이재명

등록 2017-10-08 17:05수정 2017-10-09 21:17

이재명
디지털 에디터

스웨덴어 ‘라곰’(lagom)은 ‘뭉근한’이라는 우리말을 떠올리게 한다. 의미는 무관하지만 운율이 제법 어울리는데다 모호한 개념을 쉬 풀어낼 수 없어서다. ‘뭉근하게’는 ‘한소끔’이나 ‘팔팔’처럼 ‘끓이다’ 앞에 쓴다. 그러나 얼마만큼인지 좀처럼 감이 오질 않는다.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적당한, 알맞은’ 따위로 번역되곤 하는 라곰도 그렇다.

라곰은 스웨덴인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태를 이해하는 열쇳말이다. 지난 1년간의 스웨덴살이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그 의미를 짐작하게 됐다. 한번은 공항에 제때 도착하지 못한 수하물을 기다릴 때였다. 매사 촉박하고 빡빡한 우리 풍경과는 달리 그들은 1시간이 넘도록 누구도 투덜대거나 항의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폭설이나 차량 고장 등으로 버스나 지하철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때도 그들은 ‘완벽한 침묵’을 유지한다. 자신은 물론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짧고 간결한 말투, 논쟁적 소재에 대한 대화를 기피하는 것도 절제와 겸양, 배려를 중시하는 라곰 정신에서 나온다.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건 자신의 부나 지위, 업적을 뽐내는 언행이다.

한 스웨덴인 친구는 라곰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부분의 스웨덴인은 쓴 커피를 마실지, 덜 쓴 커피를 마실지 결정하는 걸 어려워한다. 그래서 중간을 택한다. 실제 중간 유분 함량의 우유가 가장 많이 팔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렇게 보면 라곰은 중간이나 평균치를 선택해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기질로 볼 수도 있다. 스웨덴이 중립국으로 남아 있는 것처럼.

라곰의 유래는 그들의 선조인 8~11세기 바이킹 전통에서 찾는다. 꿀을 발효시켜 만든 술을, 코뿔소 뿔 모양의 잔에 돌려 마시던 풍습을 지녔던 바이킹인들은 한 사람이 너무 많이 마셔도 적게 마셔도 곤란했다. 앞사람이 맘껏 마시면 뒷사람의 술이 모자라고, 반대라면 누군가 남은 술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 눈치껏, 적당히 마시되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자기만족도 필요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라곰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북유럽식 삶의 철학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소개한다. 라곰이 생존이나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업적을 과시해야 하는 경쟁에서 사람을 해방시킨다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렇지만 라곰을 행복한 삶의 철학과 등치시키는 건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실제 만나본 스웨덴인은 매우 인간적이고 타인에 대한 관심도 많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길 원한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런 관계를 어떤 이는 무심함이나 냉정함으로 느낀다. 특히 외국인은 먼저 다가가거나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 없는 스웨덴인을 친구로 사귀기 매우 어려워한다. 이런 ‘거리 두기’는 부모·자식, 남편·아내, 형제자매 사이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는 낡은 가족구조의 해체나 양성평등을 높이는 원동력이었을지 모르나 외로움을 전염병처럼 번져나가게 했다. 스웨덴은 성인의 40%가 지독한 외로움을 호소하고 세계에서 우울증 치료제 소비가 가장 많으며, 인구의 절반이 혼자 살아가고(1인 가구) 4명 중 1명이 홀로 죽어간다. 자기 감정을 드러낼 수도, 가족과 친구의 어깨를 빌릴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나마 기댈 곳은 시스템일는지 모른다. 라곰 문화가 종종 스웨덴인의 ‘복지 의존도’ 증가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이유다.

추석 연휴 기간, 무연고 사망자 수가 지난 5년 새 64% 이상 늘었고 상당수는 유가족이 시신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뉴스가 전해졌다. 고립되는 개인이 늘어갈수록 돌봄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커질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개인을 보살피는 사회안전망이 강력해지자 점점 서로가 서로를 돌보지 않게 된 ‘복지 천국’ 스웨덴의 그늘도 알아야 한다.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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