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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우리 청년들은 ‘병풍’이 아니다 / 김은형

등록 2017-10-18 18:08수정 2017-10-18 19:21

김은형
문화스포츠 에디터

지난해 말 조카 둘이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이었다.

첫 단추는 잘 끼워지는 것 같았다. 작은조카가 먼저 합격 소식을 전해왔다. 그런데 하필 합격한 회사에 연수 들어가는 날 다른 기업의 최종면접이 있었다. 물론 합격한 회사가 원하는 곳이었다면 고민의 여지가 없었겠지만 그곳은 취업정보 사이트에서 박봉과 과로, 높은 조기 퇴사율로 악명 높은 중견기업이었다. 반면 면접을 앞둔 곳은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공기업이었다. 고민 끝에 조카는 사기업 연수 대신 경쟁률 2:1이라는 공기업 최종면접을 갔고 결과는 탈락이었다.

조카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언니는 “어차피 공기업 채용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래”라고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나는 그런 언니를 핀잔했다. “언니가 전업주부만 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데 요즘이 능력도 없이 ‘빽’으로 취업하는 호락호락한 세상인 줄 알아?” 나는 조카가 대단하지도 않은 스펙으로 최종면접까지 간 것만도 운이 좋은 거라며, 자격증도 더 따고 더 열심히 준비하라고 사회생활 20년의 노하우를 담은 ‘조언’을 했다.

최근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나오는 공기업 채용비리 보도를 보면서 나의 조언이 얼마나 같잖은 헛소리였으며 20년 사회생활의 지혜는 전업주부의 현실인식보다 뒤처진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조카가 한가락 하는 이름 한 글자 적혀 있지 않은 깨끗한 이력서 때문에 떨어졌는지 부족한 실력 때문에 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조카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서류에서 최종면접까지 고르게 탈락하면서 취준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공대생인 큰조카는 처음부터 공기업 취업을 준비했다. 대학시절 학점 관리를 못 해 일반 대기업은 들어가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대기업 규모의 누구나 알 만한 공기업에서 당최 사명 한번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 공기업까지 다양하게 원서를 넣었다. 서류전형 탈락도 있었지만 최종면접에서 여러번 떨어진 것 같다. 속이 타는 조카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또 다른 언니는 “얘가 긴장하면 눈을 잘 못 마주쳐서 면접 심사관들한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거 같다”며 면접학원이라도 보내야 할까 보다라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나는 여기서도 조카가 뭐 하나 튀는 장기라도 있냐며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취직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니 좀 더 갈고닦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조카 역시 어떤 이유로 탈락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면접학원에 비싼 돈을 날리지 않아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은 든다.

고도성장의 정점이자 고꾸라지기 직전인 1990년대 중반 취업했던 나는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나 편하게 직장을 가졌고, 짧은 시기나마 많은 걸 누렸다. 청년 실업난에 대해 근심하는 척하면서도 그 고통의 강도를 가늠할 수 없으니 ‘네가 더 잘나야 사회가 너를 받아준다’는 꼰대의 훈계질을 조언이랍시고 할 뿐이다. 아마도 내 연배의 중간급 간부들 중 많은 이들이 나처럼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개인 탓만 하는 동안 정작 좋은 일자리의 상당수는 고만고만한 실력조차 갖추지 못한 유력자의 자녀와 지인들에게 도둑질당하고 있었다.

큰조카는 지난달 말 어느 지역 도시 공기업의 최종면접을 포기했다. 그리고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지난해 한국인 취업비자 발급이 1만명을 넘겼다는 일본의 기업에 취직했다.

18일 정부는 81만개의 공공부문 일자리 확충을 포함한 ‘일자리 정책 5년 로드맵’을 확정했다. 저 많은 일자리 중 성실하고 평범한 취업준비생에게 열려 있는 괜찮은 직장은 얼마나 될까. 조카들과 같은 수많은 취업준비생에게 이번 발표가 면접장의 ‘병풍’들을 향한 희망고문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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