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찬
방송에디터석 기자
도시농업을 시작하면서 첫 다짐이 유기농이었다. 내 가족과 먹을 농작물에 화학비료, 농약을 칠 농부가 세상에 있을까. 도시농업을 시작한 곳이 큰아이 유치원 텃밭이라 그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뼛속까지 촌놈’인 나는, 그렇다고 ‘뼛속까지 농업인’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심은 작물은 뭐든 잘 자랐다. 씨를 뿌리고, 모종을 내서 때맞춰 거름 주면 자라는 줄 알았다. 도시농부가 되어서도 주말에 밭에 가면 풀 뽑고, 물 주는 일이 농사 기술의 전부였다. 그래도 상추, 깻잎, 겨자 따위 푸성귀는 잘만 자랐다. 그야말로 ‘저절로 유기농’이었다.
2015년 11월 북한산 주말농장에서 수확한 배추. 배추를 김장할 정도로 키우려면 화학비료인 복합비료를 쓸 수밖에 없었다.
선유아리 농장 앞에 농협에서 산 퇴비가 쌓여 있다. 가축분 퇴비는 토양 개량을 위해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유기질 비료다. 사진 백두 제공
고추와 배추는 도시농부 9년째인 지금도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한 작물이다. 고추는 장마철이 지나면서 잎이 시들더니 여름 더위에 말라 죽기 일쑤였다. 방치한 배추는 김장은커녕 국도 못 끓일 정도로 잘았다. 농사를 시작한 지 두번째 가을이었을까? 고향(월동배추로 유명한 남쪽 동네) 텃밭 배추는 내가 키운 배추와 차원이 달랐다. 아버지께 비결을 꼬치꼬치 물었다. 창고에서 봉지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농작물 만병통치약(?)이라는 복합비료(복비)와 운명적인 만남. “땅심이 약한디 배추가 크것어? 요놈을 적당히 조야써. 사람으로 치면 영양제랑께.” 대신 농약은 절대 치지 말고 벌레는 손으로 잡으라고 당부하셨다. 아버지의 첫번째 농사 훈수가 ‘복비 처방’이었다. ‘유기농을 향한 일편단심’은 아버지의 관행농법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수박, 참외 따위 열매가 맺는 작물은 유기질 퇴비가 더 많이 필요하다. 지난 6월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 선유아리농장 밭에 자라고 있는 수박과 참외 모종.
도시농부들이 지난 4월1일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 아리농장에서 유기질 퇴비를 넣은 밭에 감자를 심고 있다.
“땅은 거짓말을 안 해요. 주는 대로 거두는 법이라니깐.” 북한산 주말농장에서 복비의 유혹은 더 노골적이었다. 농장 주인은 복비는 물론 토양 살충제, 약한 농약까지 은근히 권했다. “유기농 고집부리다 농사 망친 사람을 숱하게 봤다”는 현실론을 폈다. 늦가을 농장은 복비를 먹은 배추와 그러지 못한 배추의 경연장이었다. 다른 밭과 크기가 터무니없이 차이가 나는 것에 의욕이 꺾인 농장 벗들도 하나둘 ‘복비파’에 합류했다.
올해도 배추 심은 밭에 복비를 서너 주먹 넣었다. 생계형 도시농부로 살면서 유기농업은 신념이 아니라 이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학비료와 농약에 찌든 땅이 한순간 유기질로 바뀔 리 없다. 5~10년 계획을 세워 서서히 토양을 개량하면서 땅심을 돋워야 비로소 결실을 맺는다. ‘참유기농’ 다짐은 아직 깨지지 않았다. 다만 그 길이 멀고 고단할 뿐이다. 2년 전 이맘때 아버지는 흙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에게 얻은 복비도 거의 떨어져간다. “복비만 믿지 말고, 부지런히 땅을 만들어야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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