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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의 화·들·짝] 인류에 기여하는 일본과 ‘천황제’

등록 2017-11-28 18:03수정 2017-11-28 19:10

천황제 국가의 흔적은 지금도 일본인들의 정신과 관행, 제도에 깊이 남아 있다. 아베 총리가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를 통해 이어받은 것도 천왕제 국가의 정신이다. 이는 일본이 천황제에서 비롯된 문제점을 풀지 않는 한 일정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일본이 지구촌에 분명히 기여할 수 있는 게 여럿 있다. 우선 초고령 사회의 모델이다. 일본은 이미 2006년에 65살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었다. 이런 사회는 인류 역사상 처음이다. 일본이 새 길을 어떻게 걸어가는지에 따라 인류의 삶 전체가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일러스트레이션 노병옥
가깝고도 먼 나라.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부근에 있는 모든 나라에 해당하는 말이다. 중국이 그렇고, 무엇보다 북한이 그렇다. 러시아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이 표현이 주로 일본에 대해 쓰이는 것은 역사적·심리적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일본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미국이라는 패권국을 통해 우리와 정치·군사적으로 긴밀하게 연계돼왔다. 일본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한 모델이었으며, 지금도 경제적으로 밀접하다. 하지만 영국이 유럽 대륙과 하나가 되는 것이 두려워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했듯이, 비슷한 섬나라인 일본 역시 아시아 대륙과 충분히 섞이지 못한다. 대륙과 해양,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가교 국가를 지향하는 우리와는 거리가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벌써 만 5년 재임을 기록한 그는 역대 최장수 총리를 바라본다. 미-일 동맹 강화와 군사일체화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군사대국화의 길로 들어선 것이 그의 최대 성과다. 숙원 과제인 개헌을 향해서도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을 내디디고 있다. 경제면에서는 그가 취임한 2012년 12월부터 시작된 경기회복 추세가 59개월째 지속되고 있다. 성장률이 높지는 않지만 완전고용에 가까울 정도로 일자리가 늘어난 것은 1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쉽지 않았던 일이다. 그가 현직에 머물 수 있는 최대 시한인 2021년 9월까지 재임한다면 일본 사회는 그의 등장 이전에 비해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일본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40년 주기설이라는 게 있다. 40년마다 국운의 상승기와 일탈·정체기가 되풀이된다는 역사관이다. 1860년대 개국 이후 1905년 러일전쟁 때까지가 1차 상승기로, 근대국가를 완성한 시기다. 이후 1945년까지는 군국주의가 득세해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비참하게 진 일탈기다. 일본은 그 뒤 경제발전에 집중해 1980년대가 되면 미국의 지위까지 위협하는 명실상부한 경제대국이 된다. 2차 상승기인 이 시기는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거품 붕괴와 함께 장기 정체기로 바뀌고, 이 시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정체기의 후반부에 있다. 곧 정체를 가속할 수도 있고 뒤이을 상승기의 기반을 닦는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위치다.

각 시기의 뒷부분에는 다음 시기의 단서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예컨대 1차 상승기의 후반부인 19세기 말에는 한반도 식민화와 대중국 대결이 줄기차게 시도됐다. 그런 시도 자체가 상승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였다. 또 1차 일탈기의 뒤쪽인 1930년대 초부터 이어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은 일본 제국주의의 몰락을 예고하는 오만의 극치였다. 2차 상승기의 결정적 계기는 미국의 점령과 민주화 개혁, 한국전쟁으로 인한 경제 붐이다. 한반도는 이때도 자신의 고통과 희생을 일본의 발전 동력으로 제공했다.

2차 상승기의 말기인 1980년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사람은 82년부터 5년 동안 집권한 나카소네 야스히로다. 그는 총리로선 처음으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는 등 과거 제국주의 유산을 이어받은 신보수주의의 탄생을 알렸으며, 이런 정치는 이후 확산해 지금의 아베 정권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다. 당시 유행한 말이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었고, 고평가된 엔화로 미국 자산 사들이기가 유행했다. 전형적인 말기 증상이다. 지금의 일본이 새 상승기를 예비하려면 기존 문제점들을 철저하게 청산하고 새로운 동력을 확충해야 한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오히려 ‘전후체제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신보수주의를 극대화하려 한다. 상승기의 말기에나 나타남 직한 행태다.

일본(日本)이라는 나라 이름이 쓰인 것은 7세기 말부터다. 중국에서 400년 가까운 할거시대를 거쳐 당이라는 통일 세계제국이 등장하고, 한반도에서도 신라가 첫 통일국가를 이뤄낸 직후다. 일본의 역사가 한반도·중국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일본은 2차대전 직후 미군 외에는 한 차례도 외국 군대에 점령된 적이 없다. 일본인들이 자신을 중심에 둔 독특한 세계관을 유지·강화해온 데는 이런 역사가 크게 작용한다.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흔히 막번체제를 끝내고 왕정을 복고한 메이지유신(1868년)을 꼽는다.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서구 따라잡기에 나서 50년 뒤인 1차대전쯤이면 세계 5대 강국이 된다. ‘유신’은 복고(Restoration), 혁명(Revolution), 개혁(Reform)을 모두 포괄하는 모호한 개념으로, 이후 양상에서도 이것들이 뒤섞여 나타난다. 일본이 서둘러 만들어낸 것은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국가가 아니라 전통에 뿌리를 둔 천황제 제국이었다. 이를 ‘비서구적 근대화’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근대 이후 일본이 지키려 한 전통은 천황제에 집약돼 있다. 20세기 전반의 천황 국체론은 식민주의를 합리화하고 전쟁 동원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일본은 2차대전에서 져 미국에 무조건 항복하게 된 상황에서도 천황제만은 고수하려 했다. 미국이 강요한 민주화 개혁으로 천황은 상징적 존재가 됐지만, 이전 천황제 국가의 흔적은 지금도 일본인들의 정신과 관행, 제도에 깊이 남아 있다. 아베 총리가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를 통해 이어받은 것도 천황제 국가의 정신이다.

일본의 정치는 1955년 자유민주당이 만들어진 뒤 지금까지 60년 이상 사실상 일당독재가 계속되고 있다. 다른 당에 정권을 넘겨준 것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3년뿐이며, 자민당 내 파벌들의 승패가 정권교체를 대신해왔다. 이런 장기집권은 천황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천황이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국민통합을 꾀하는 총력체제가 만들어진 뒤 일본 사회, 특히 지역사회는 거의 본질적 변화를 겪지 않았으며, 이 체제를 유지·강화하려는 핵심 정치세력이 바로 자유민주당이다. 기존 정치구도에 도전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한 것은 실핏줄처럼 퍼져 있는 기득권 구조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체제는 자유롭지 못하고 민주적이지도 않다. 이는 일본이 천황제에서 비롯된 문제점을 어떤 식으로든 풀지 않는 한 일정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아베 총리는 ‘이제 전후체제를 청산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미래는 클라인 병처럼 주둥이를 찾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천황제 국가라는 과거로 향한다.

일본은 독자적인 경영 방식에 기초한 경제력과 독특한 문화콘텐츠 등으로 인류에 기여해왔다. 서구와 판이하고 아시아권에서도 구별되는 공동체적인 사회 역시 인류 삶의 한 형태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세계 총생산의 15%를 차지하던 1980년대만큼은 아니지만 주요 경제권이라는 위상도 적어도 앞으로 수십년간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도 그랬듯이, 자신의 힘에 부치는 대외 확장을 추구한다면 새 상승기에 들어가기는커녕 다시 정체·일탈기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일본이 지구촌에 분명히 기여할 수 있는 게 여럿 있다. 우선 초고령 사회의 모델이다. 일본은 이미 2006년에 65살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으며 지금은 그 비율이 28%에 이른다. 이런 사회는 인류 역사상 처음이다. 일본이 새 길을 어떻게 걸어가는지에 따라 인류의 삶 전체가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저성장 사회에서 공동체적인 가치를 유지하면서 삶의 질을 높여가려는 모습도 주목된다. 일본 사회는 이와 관련한 여러 실험을 하고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서 ‘평화의 균형자’ 구실을 하는 일이다. 평화헌법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아시아 나라들과의 평화로운 공존공영뿐만 아니라 일본 자신의 새로운 상승을 위해서도 필수다.

우리나라는 이런 일본과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여러 차례의 민주혁명을 통해 과거를 청산하고 새 체제를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본질에서 미래지향적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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