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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의 화.들.짝] 인종주의 확산, 어디까지?

등록 2019-08-06 17:33수정 2019-08-07 14:52

지구촌 곳곳에서 인종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구호가 상징하듯이, 이제는 새 이주민뿐만 아니라 자국 시민이나 오랜 거주자에도 칼을 들이댄다. 인종주의를 공개적으로 내건 나치 정권이 2차대전을 일으킨 1930년대 이후 가장 위험한 상황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성공한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크게 기여하는 점은 역설적이다.

■ 인종주의(racism)란 “행위가 아니라 속성에 근거해 타자를 분류하고, 측정하고, 가치 매기고, 증오하고, 심지어 말살하는 서양 근대의 이데올로기”(<낙인찍힌 몸>)다. 곧 겉모습만으로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박해하는 정치·사회 이념이다. 가장 두드러진 속성은 피부색이지만, 종교·민족·외모·문화 등도 빌미가 된다. 이슬람권 이주민을 공격하는 유럽 극우파의 행동 역시 인종주의의 산물이다.

인종주의는 서구 제국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대외 팽창에 나선 서구인이 자신과 겉모습이 다른 사람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하려고 고안한 사상적 도구가 인종주의다. 가장 구체적인 계기가 아프리카 흑인의 노예화와 노예무역이다. 유럽인이 주도한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 규모는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말까지 1200만명에 이른다. 유럽인은 이 노예들에게 열등한 인종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현대 과학의 틀이 마련된 19세기에 인종주의는 새 차원으로 접어든다. 두개골을 측정하는 골상학과 우생학이라는 유사과학을 통해 인종 사이 우열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기승을 부린다. 강자 중심의 논리로 왜곡된 사회진화론도 인종주의 확산에 기여한다. 민족주의가 근대국가의 기본 원리로 자리를 잡으면서 인종주의의 외연이 넓어지고 강도가 높아진 것도 이 시기다. 생물학적 인종주의라고 할 이런 여러 흐름이 모이는 곳에 나치 정권이 있다.

지금의 인종주의는 신인종주의 또는 문화적 인종주의로 불린다. 생물학적 인종주의에 사회·경제·종교·문화적 요인이 더해져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지리적으로도 인종주의 역사가 오랜 서구 나라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모델로 삼아 근대화에 나선 많은 나라가 인종주의에서 비롯되는 크고 작은 갈등을 겪고 있다.

■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주의 행태는 젊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백인 우월주의자 수준으로 뿌리가 깊은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그러나 정치 무대에 나선 뒤로는 일관되게 인종주의에 기댄다. ‘정치적 인종주의자’ 또는 ‘전략적 인종주의자’인 것은 확실하다. 그는 최근 유색인종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 여성 유색인종으로 민주당 초선의원이 된 4명에게 “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각 푸에르토리코계, 소말리아계 무슬림, 팔레스타인 난민 2세, 흑인이다. 그의 인종주의는 외국인·여성에 대한 혐오와 결합해 있다.

인종주의 정치는 1970년대까지 흑인이 많은 미국 남부에서 성행했다. 이후 이 지역의 경제·문화가 발전하면서 크게 줄었고, 인종주의에 기댄 정치 행태는 일종의 금기가 됐다. 트럼프는 이 흐름을 되살려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최근 잇달아 일어난 백인 우월주의 총격범죄도 그 흐름 속에 있다.

트럼프는 ‘착한 우리 대 나쁜 그들’의 구도를 만들어 당파성을 극대화하는 정치를 한다. 겉모습이 다른 소수파를 희생시켜 지지세력을 결집하고 권력 집중을 꾀하는 것은 인종주의 정치의 기본 공식이다. 공화당 안에서는 이미 성공하고 있다. 트럼프에게 호응해 발언하는 의원이 늘고 있으며, 온건파는 침묵한다. 트럼프가 백인 정체성 강화를 부추기기 위한 무기는 하나 더 있다. 경제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곧 인종주의와 무역전쟁이 트럼프 정치의 고갱이다.

■ 트럼프의 인종주의는 공격적이긴 하지만 아직 미완이다. 오랜 시일에 걸쳐 형성된 자유·민주 제도가 작동하는데다 여론의 저항도 거세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자국 내 소수파에 대한 인종주의를 법으로 이미 완성한 나라가 있다.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70돌을 맞은 지난해 7월 전례 없는 내용의 민족국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역사적 조국이며, 그들은 배타적 자결권을 갖는다”고 규정한다. 이스라엘에는 인구의 20%가 넘는 200만명의 아랍계 주민이 산다. 유대인이 배타적 자결권을 갖는다면 이들이 설 자리는 없다. 정부는 이들의 시민권을 보장하겠다고 하지만 실제 분위기는 그렇지가 않다.

아랍계 주민(팔레스타인인)들을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골다 메이어 전 총리는 ‘요르단이라는 팔레스타인 국가가 이미 있는데, 왜 팔레스타인 사람이 이스라엘에 사는가’라고 한 바 있다. 이른바 ‘요르단 옵션(선택지)’이다. 우파 정치인과 군인, 학자 등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지지가 커진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인구 위협’으로 규정한 바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추방을 지지하는 유대인의 여론도 절반 정도까지 높아졌다. ‘땅과 평화의 교환’이라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법은 사실상 폐기 상태다.

이런 인종주의는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거울 이미지처럼 뒤집어 놓은 것과 같다. ‘욕하면서 닮는’ 꼴이다. 트럼프는 이스라엘 우파의 이런 움직임을 강하게 지지한다. 그는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 점령한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주권을 지난 3월 공식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이스라엘을 본떠 ‘미국은 백인이 배타적 자결권을 갖는 국가’라고 규정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구호는 일본에서도 나온다. 대상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주한 재일동포와 그 후손이다. 일본 우익세력은 재일동포가 오히려 특권을 누린다며 추방할 것을 주장한다. 이들은 군대위안부나 강제징용자 개인 배상 문제도 인종주의 시각에서 본다. 존재하지 않거나 이미 해결된 사안인데도 자꾸 들추는 것은 뒤떨어진 민족이 ‘무오류 천황’이 통치해온 일본을 흠집 내기 위해서라고 강변한다.

이런 인식은 강도는 다르지만 아베 신조 총리 등 일본 집권세력도 공유한다. 그 매개 조직이 일본회의다. 이 단체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범죄에 대해 공식으로 사과한 무라야마 총리 담화 등이 나온 1990년대 중반, 극우·보수 세력이 결성한 최대 신우익조직이다. 아베 총리는 창립 회원이다. 현재 아베 내각 각료의 80%, 국회의원의 40% 정도가 이 단체와 관련돼 있다.

유럽 대륙에서도 2010년 경제위기 이후 인종주의의 득세가 뚜렷하다. 영국에서는 강경 브렉시트 지지자인 보리스 존슨 총리가 최근 취임하면서 인종주의가 더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크다. 성향이 비슷한 트럼프와 존슨이 장기 집권에 성공한다면, 과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었듯이 새로운 인종주의 시대가 올 수 있다.

■ 인종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최대 치부 가운데 하나다. 확산하는 인종주의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큰 희생과 더불어 파국으로 향할 수 있다. 우리나라 또한 이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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