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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의 화·들·짝] 독일의 과제와 지구촌의 앞날

등록 2017-12-12 17:58수정 2017-12-12 19:28

사회적 시장경제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사회 정책을 자유시장 경제와 결합한 사회경제 모델이다. 이 모델이 잘 작동하려면 내실 있는 사회보장 제도와 모든 경제·사회 주체들 사이의 협력이 필수다. 속도가 다소 떨어질 수는 있지만 일단 합의가 이뤄지면 충실하게 집행되는 구조다.

독일은 2015년 이슬람 난민 위기 때 ‘대거 수용’ 방침을 밝힌 거의 유일한 나라다. 독일로선 이민자 수용 확대가 줄어드는 인구 문제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다. 앞으로 독일이 난민·이민 문제에서 흔들린다면 유럽통합이라는 이상 자체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독일은 다채로운 유럽 나라들 가운데서도 우리와 정서적 끈이 강한 편에 속한다. 1960~70년대에 독일로 간 대규모의 한국인 간호사·광부, 비슷한 분단국 경험, 일본과 대비되는 독일의 과거청산 태도, 일찍부터 우리 교육과정에 들어온 독일어와 문학·철학, 독일 사회의 높은 평화·인권·생태 감수성 등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의 독일은 유럽연합(EU)의 앞날이 그 어깨에 달려 있을 정도로 중요한 나라다.

지난 9월 하순 치러진 총선에서 기민련이 승리해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4연속 집권이 당장 실현되는 듯했다. 그런데 이후 두 달 동안 이어진 자유민주당·녹색당과의 연정 협상이 깨지면서 제1야당인 사민당과 대연정을 하거나 다시 총선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어느 쪽이든 정치적 불확실성이 생긴 것이다. 실제로 브렉시트 협상, 난민 위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권에 대한 대응, 금융 안정을 비롯한 유럽 경제의 진로, 우크라이나 문제 등 유럽연합 차원의 모든 현안이 독일의 주도력이 없으면 풀기가 쉽지 않다.

독일은 정치가 안정된 나라다. 이는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출범 이후 총리를 지낸 사람이 8명에 그치는 데서도 나타난다. 비슷한 기간 동안 수십명의 총리가 나온 일본과 이탈리아는 제쳐놓더라도, 13~14명의 대통령 또는 총리를 거친 미국·영국과도 차이가 있다. 이웃 프랑스는 2차대전 직후 12년 동안 23차례나 내각이 바뀌었으며, 1958년 5공화국 출범 뒤에도 8명의 대통령을 겪었다.

독일에선 치열한 정책 협의를 거친 연립정부 구성이 일상적이다. 기민련과 사민당의 대연정도 두 차례 이뤄졌다. 연정이 규범으로 정착되다 보니 정치의 불확실성은 그만큼 줄고 정책 연속성은 커진다. 예를 들어, 소수당인 자민당 출신의 한스디트리히 겐셔는 사민당 주도 연정과 기민련 주도 연정을 오가면서 1974년부터 통일 이후인 1992년까지 18년이나 외무장관을 지냈다. 정당 차이보다는 국가적 과제의 해결 능력을 우선시한 것이다. 총 집권 기간은 보수적인 기민련이 48년으로 진보적인 사민당의 20년보다 훨씬 길지만, 업적은 양쪽 다 만만찮다. 이런 전통에서 보면 이번 ‘정치 위기’도 대승적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크다.

전쟁에서 져 거의 폐허가 된 독일은 1950~60년대에 고도성장해 유럽 최대 경제권으로 복귀한다.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이다. 1990년대에도 심각한 통일 후유증에 시달리던 독일은 이후 내부 개혁으로 경제 활성화의 바탕을 강화하는 데 성공한다. 그 위력은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 경제위기가 지구촌 전체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위기에 시달리기는커녕 오히려 유럽 경제를 좌우하는 지도력을 굳히게 된 것이다. ‘2차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할 만한 현상이다.

개혁이 1997년부터 8년간 집권한 사민당 정권 때 주로 이뤄진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추진한 ‘어젠다 2010’과 ‘하르츠법’이 대표적이다. 어젠다 2010은 노동시장·산업·조세·환경·이민·교육·행정 등 폭넓은 분야의 개혁 정책을 담고 있으며, 정부 산하 하르츠위원회가 만든 하르츠법은 4단계 노동시장 개혁안이다. 이를 통해 독일은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 실업수당과 건강·연금보험 등 각종 사회복지 비용 조정, 연금 수급 연령 2년 상향 등을 이뤄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탄력적 일자리를 늘리게 된다. 이런 노력은 1997년 유럽 공동 통화 유로 도입 이후 강화된 시장 통합과 맞물려 독일의 실업률을 낮추고 무역흑자를 키운다.

이 개혁은 독일 특유의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중국이 자국 경제를 일컫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socialist market economy’로, 독일과 큰 차이가 있다) 전후 새 출발을 할 때부터 유지해온 사회적 시장경제는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사회 정책을 자유시장 경제와 결합한 사회경제 모델이다. 이 모델이 잘 작동하려면 내실 있는 사회보장 제도와 모든 경제·사회 주체들 사이의 협력이 필수다. 노동자의 경영 참여가 보장되고 회사와 노조, 지역사회가 함께 참여하는 노사협의회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교육 등 인재 육성도 노사협의회 차원에서 접근한다. 자본이나 정부, 노동 등 어느 한쪽의 일방적 의도가 아니라 여러 대안을 검토해 선택하는 협상의 결과물로 정책이 결정된다. 속도가 다소 떨어질 수는 있지만 일단 합의가 이뤄지면 충실하게 집행되는 구조다.

2차 라인강의 기적은 사회적 시장경제와 ‘통합 정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독일 또한 다른 선진국처럼 양극화의 길을 걸어왔으며, 경쟁력이 약한 유로 회원국의 희생을 바탕으로 경제 활력을 이어간다는 비판도 적잖다. 상당한 진실이 담긴 지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시장경제의 장점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 나라들은 이제 ‘유럽의 독일화’를 걱정한다. 통일 당시에도 그런 우려가 강했다. 동서독 통일은 어느 주체도 제대로 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일종의 ‘돌발 사태’로 여겨진다. 서독의 기본법(헌법)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서독의 경제력과 외교력에 힘입어 통일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흡수통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겉모습의 일부만 본 것일 뿐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통일의 최대 동력은 동독 주민의 열망이었다. 그들의 집단행동이 진화하면서 통일은 갑자기 당면 과제가 됐다.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를 비롯한 동서독 정치세력은 기민하게 그 동력을 정치로 끌어들여 제도화했다. 동독인들은 애초 ‘우리는 민중이다’(Wir sind das Volk)라며 체제 민주화를 외쳤다. 이 구호는 곧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바뀌었다. 민주화의 완성이 통일이라고 본 것이다. 콜 총리도 이와 관련해 ‘통일은 독일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이뤄낸 성과’라고 했다. 통일의 역사적 의의는 동독에서 36년 동안 살았던 메르켈 총리가 이미 12년간 집권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통일 직후인 1992년 유럽 나라들은 서둘러 유럽공동체(EC)를 유럽연합으로 발전시키는 내용의 마스트리흐트조약에 서명했다. 유럽 한가운데에 통일독일이라는 강국이 등장하는 데 대한 우려를 유럽통합 강화로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다. 과거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민족이 번성하려면 중·동부 유럽을 중심으로 독일의 생활권(레벤스라움)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그가 2차대전을 일으킨 한 동기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냉전 종식 이후 중·동부 유럽의 체제전환국들은 독일 산업의 하청기지이자 투자처로서 사실상 독일 생활권이 되고 있다. 인구가 8천만명이 좀 넘는 독일은 6600만~6700만명 수준의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그렇게 크지 않다. 1인당 소득도 비슷하다. 그런데도 유럽 내 위상이 두 나라보다 훨씬 높은 배경에는 중·동부 유럽의 중심지라는 지정학적 이점이 작용한다.

독일 주민의 다수는 국제사회의 우려를 잘 알기에 민족주의에 대해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그런데도 9월 총선에서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제3당으로 부상했다. 그 주된 원인인 난민·이민 문제는 메르켈 정부의 최대 현안 가운데 하나다. 독일은 2015년 이슬람 난민 위기 때 ‘대거 수용’ 방침을 밝힌 거의 유일한 나라다. 독일로선 이민자 수용 확대가 줄어드는 인구 문제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다. 앞으로 독일이 난민·이민 문제에서 흔들린다면 유럽통합이라는 이상 자체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다.

어느 나라든 평화로운 세상에서 질 높은 삶을 누리면서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켜가기를 바란다. 유럽은 이런 시도에서 가장 앞선 지역이며, 독일은 그 중심에 있다. 곧 세계사라는 큰 흐름에서 볼 때 독일은 그 맨 앞에 서 있다. 독일의 과제는 지구촌 전체의 과제이기도 한 셈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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