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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디지털 탈옥을 꿈꾸며 / 이재명

등록 2017-12-31 18:48수정 2017-12-31 19:02

이재명
디지털 에디터

지금 내 심장은 1분에 78번을 뛴다. 정확히 1년 전, 스마트폰에 저장된 심장박동 수는 71회였다. 한해 새 내 심장은 10%나 더 열심히 일하고 있는 셈이다. 심박 수는 나이가 들수록 줄어든다. 아이의 심장은 분당 120회 정도로 빨리 뛰고, 어른은 60~70회 사이를 오간다. 줄어야 마땅할 심박 수가 왜 늘어난 걸까.

1년 전 오늘은 해외 연수 중이었다. 출근이나 기사 마감에 쫓길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심심한 시간이 늘었다. 빈둥거리는 날이 길어지자 어느새 손에 책이 들려 있었다. 걸음걸이는 느려졌고 미처 보지 못했던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심장도 그만큼 제 역할을 줄였다. 느긋해진 내 몸과 마음은 밖으론 관대함으로, 안으론 사색으로 이어졌다.

다시 업무에 복귀한 지 5개월이 흘렀다. 이제 몇분에 한 번씩 모바일 기기를 확인하고 몇시간씩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데도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 회사 동료들과 24시간 연결된 디지털 기기는 일과 쉼의 단절을 불가능하게 했다. 아침저녁은커녕 계절의 변화를 느낄 여유도 없을 만큼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걸음걸이는 어느샌가 빨라졌다. 심장도 주인의 가파른 호흡을 따라가느라 박동 수를 다시 늘렸을 것이다. 성정은 강퍅해지면서 매사 성마르게 변해가는 중이다.

밥벌이의 고단함을 벗어날 길이 없음을 알면서도 새해 첫날 ‘디지털 탈옥’을 꿈꾸는 이유는 이런 내 몸의 뚜렷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빨라진 맥박보다 나를 괴롭히는 증상은 현격한 집중력 저하다. 모니터 속의 글은 뒤 문장이 앞 문장을 갉아 먹는 듯하다. 서너 문장을 읽다 보면 첫 문장의 글들이, 움켜쥔 주먹 속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듯, 기억 밖으로 밀려난다. 결국 종이에 프린트한 뒤 읽어야 문맥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클릭’은 ‘행간’을 읽을 여유나 ‘정보의 여백’을 누리는 기쁨 따위를 앗아가버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또 한가지는 멀티태스킹(다중작업)이다. 팝송을 들으며 소설을 읽을 수는 있어도, 기사를 쓰면서 1초 간격으로 텔레그램 메시지를 주고받고 기획 아이디어까지 제출하는 건 내 능력 밖이다. 작업창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다 보면 저녁쯤엔 내가 오늘 뭘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결정적인 이유는 멀미가 날 정도로 빠른 디지털의 변화 속도다. 죽을힘을 다해 겨우 따라잡았나 했더니, 경쟁자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을 때 느끼는 열패감이 시도 때도 없이 밀려온다. 더욱이 이제 디지털은 아날로그의 반대말을 뛰어넘었다. 알파고에서 보듯 디지털 혁신은 단순히 컴퓨터 계산 속도가 빨라지는 방식이 아니라 변증법적 진화 단계에 있다. 이런 디지털 세상이 누군가에게, 특히 젊은 세대에겐 유희의 공간이자 영감의 원천이 된다. 그렇지만 난 여전히 디지털 밖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내 몸의 본질은 아날로그이고 그래서 심심하거나 지루할 때 가장 창의적이다.

세상은 이미 저항할 수 없는 디지털 중력에 휘둘리고 있다. 반면 내가 알던 세계는 이미 쪼그라들면서 스러져가고 있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에서 무기력해지는 대신 내 몸이 느끼는 중력에 충실하기로 했다. 적어도 디지털에 삶의 주도권을 뺏기진 않겠다는 몸부림이다. 그래서 어떻게? 뇌를 비우고 쉬게 할 것이다. 많은 것에 매달리지 않고 중요한 것에 집중할 생각이다. 당장은 내 심장박동 수보다 느린 음악을 틀고 그 리듬에 맞춰 걷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다. 이 다짐을 지키지 못해도 좌절하지 않겠다. 안 되면 개꿈을 꿨다고 위로하면 된다. 올해는 개띠 해니까.

mis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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