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에디터 김기식, 안희정, 제이컵 주마,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모두 유명 정치인이다. 앞의 두 한국 정치인 근황은 잘 알려져 있다. 주마는 많은 범죄 혐의를 받다 2월에 사임한 전직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다. 브라질의 룰라 전 대통령은 10월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 1위를 달렸으나 뇌물죄로 기소돼 항소심까지 유죄를 선고받고 최근 구속됐다. 일부 반성 속에서도 저마다 억울해한다. 손가락질받는 이유와 잘못의 정도는 각기 다르다. 도맷금으로 취급하면 부당하다고 따질 이도 있겠으나 넷을 관통하는 맥락이 있다. 첫째, 민주화운동, 인종차별 철폐 운동, 노동운동 등으로 사회 진보를 위해 활약했다. 둘째, 고귀한 노력과 자기희생을 인정받아 영예로운 자리에 올랐다. 셋째, 자리와 이어진 유혹 탓에 결국 명성에 금이 갔다.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진보 인사는 더 큰 회초리를 맞는다. 매의 눈을 지닌 보수 세력의 공격도 집요하다. 문제의 인사들이 과거에 개인보다는 공중의 이익을 앞세웠으니까 이제 와서 상황이나 남 탓을 하는 것은 궁색하다. 이 넷을 가리켜 ‘사람이 변했다’고 할 수 있다. 벼락부자나 갑자기 큰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많이 듣는 말이다. 과연 달라진 것일까? 얼마나 달라진 것일까? 나는 룰라 전 대통령의 멘토였던 브라질 가톨릭 사제에게 몇해 전 이메일로 물은 적이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은 훌륭한 사회정책으로 칭송받았지만, ‘사람이 변했다’고 욕하는 옛 동지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답신은 간단했다. “룰라에 대해 그리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룰라가 원래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오.” 좀 선문답 같았다. 우선 룰라 전 대통령이 변질됐다고 비난하는 이들한테 동조하는 것 같았다.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 같기도 했다. 사람은 본래 야누스적이고 상황에 따라 바뀌는 존재인데 왜 뻔한 질문을 하냐는 면박인 듯도 했다. 요즘 일들을 보니 마지막 해석이 그럴싸하다. 누군가 길을 걷는데 어린애가 엎어져 운다고 가정해보자. 극히 일부의 냉혈한이 아니라면 애를 일으켜세워 달래줄 것이다. 흙먼지도 털어줘야 한다. 이게 사람이고 인지상정이다. 그러고서는 뿌듯한 마음으로 마저 길을 가는데 바닥에 작은 금반지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인간은 갈린다. 1. 냉큼 주워 현장을 재빨리 벗어난다 2. 머뭇하다가 다른 눈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신발을 고쳐 신는 척하며 줍는다 3. 큰 금덩이라면 줍겠지만 시간도 없고 해서 까짓것 하며 지나친다 4. 욕심은 없지만 주인을 찾아주기는 귀찮으므로 그냥 간다 5. 잃어버린 사람을 생각해서 경찰에 맡긴다…. 천하가 악인이라고 부르는 사람, 누구나 의인이라고 칭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해득실의 무게를 비롯한 조건들이 같은 사람을 선인으로도 악인으로도 만든다. 사람은 늘 이렇게 다양한 상황 속에서 고민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간단한 질문이 아닌 이유다. 상황을 과장하면서까지 정치적 공격만 가하는 쪽이나, 반대로 ‘너희는 그리 깨끗하냐’고 하는 쪽이나 균형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아무튼 정의를 외쳐온 인사들일수록 심지어 시시포스적 운명을 ‘기대’하는 과도한 시선마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리가 높아질수록 잘못의 크기도 커진다. 무의식에라도 ‘내가 그만큼 고생했는데…’라는 식의 태도가 자리잡는다면 악의 수렁에 빠질 확률이 커진다. “악은 손쉽게 그리고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리로 가는 길은 평탄하고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신들은 덕과 우리 사이에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정해두셨다.”(헤시오도스, <일과 나날>)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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