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정세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진원지는 이란 핵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자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감행한 미국이다. 중동 지역에는 이미 장기 분쟁이 여럿 있다. 트럼프 정부는 이들 사안을 뒷전에 제쳐놓은 채 새로운 판짜기를 꾀한다. 이란 핵협정 탈퇴가 이를 위한 본격 출발이다.
이란은 과연 중동 전역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악의 축을 만들 만큼의 의지와 역량이 있는 나라인가? 모든 것을 따져봐도 이란이 중동을 장악하기 위해 팽창을 시도해왔다는 증거는 없다. 악의 축은 선의 축을 합리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마니교적 기획이다. 이런 시도는 이라크 침공 직전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그는 이것에 대해 흥분했다. 그는 이것이 중요한 일, 역사적인 일, 역사의 올바른 쪽에 있는 아주 대단한 일, 또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하나님의 올바른 쪽에 있는 일인 것으로 느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고 ‘이것’은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이다. 5월 중순 열린 현지 개관식 행사 직후 미국 대사인 데이비드 프리드먼이 자신도 엄청난 자부심을 느낀다며 한 말이다.
예루살렘 관할권 문제는 중동 정세의 뇌관과 같다. 그래서 유엔은 일찍부터 예루살렘을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도시로 규정했다. 하지만 미국의 기독교 우파와 유대인 보수파는 이 도시를 아마겟돈(최후의 전쟁)의 근거지가 될 자신들만의 성지로 여긴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과 이스라엘 강경파의 주요 정치 기반이다.
중동 정세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진원지는 이란 핵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자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을 감행한 미국이다. 중동 지역에는 이미 장기 분쟁이 여럿 있다. 7년 넘게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 더 거세진 예멘 내전, 수십년 묵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미국의 침공 이후 안정되지 않은 이라크 상황, 분리독립을 꾀하는 쿠르드족과 터키 사이의 충돌 등이 그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이들 사안을 뒷전에 제쳐놓은 채 새로운 판짜기를 꾀한다.
핵심은 이란을 주적으로 설정하고 그에 맞서는 큰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란 핵협정 탈퇴가 이를 위한 본격 출발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탈퇴 이후 전략’으로 지난주 이란에 제시한 12가지 요구사항은 미국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미국은 우라늄 농축 중단과 플루토늄 재처리 금지, 탄도미사일 개발·발사 중지 외에, 헤즈볼라(레바논)-하마스(팔레스타인)-후티 반군(예멘)-탈레반·알카에다(아프가니스탄) 등에 대한 지원 중단,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의 무장해제, 시리아 내 모든 군사력 철수 등을 이란에 강요한다.
이란은 중동의 모든 분쟁에 직접 개입하거나 배후 세력 구실을 하는 ‘원초적 악’으로 설정돼 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최대 정치세력인 헤즈볼라와 하마스, 예멘과 아프가니스탄의 최대 반정부 세력인 후티 반군과 탈레반, 이라크의 최대 비정부 무장세력인 시아파 민병대가 모두 이란의 지원 또는 조종을 받는다는 게 트럼프 정부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란과 그 동조자·추종자로 이뤄진 ‘악의 축’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축출돼야 하며, 이들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악의 축은 대부분 이슬람 시아파여서 이슬람 내 종파전쟁의 성격도 띤다.
미국은 이에 맞서는 ‘선의 축’을 내세운다. 맨 앞에 미국·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가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 강경파는 트럼프 정부 출범 직후부터 긴밀하게 움직여왔다. 지난해 6월 사우디 등 아랍권 7개국이 친이란 및 테러 지원을 이유로 카타르와 단교한 일이 그 가운데 하나다. 사우디의 젊은 왕세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은 확고한 친미 노선을 통해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권과 탈석유 이후 자국의 미래를 보장받으려 한다.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과 관련해서도 여러 아랍국가가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만들 것이라며 비판했으나 사우디는 침묵했다.
여기서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이란은 과연 중동 전역의 패권을 차지하려고 악의 축을 만들 만큼의 의지와 역량이 있는 나라인가?
최근 역사와 상황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친미 팔레비 왕조를 종식한 1979년 이란혁명이 중동에서 반미 분위기와 이슬람 세력의 정치화를 부추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아파의 세력 확대는 대부분 이란의 지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별개의 정치 과정을 통해서, 또는 미국의 잘못된 정책에 의해 이뤄졌다.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은 이라크에서 소수 수니파가 오랫동안 장악했던 권력을 시아파에 넘겨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란으로선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다. 헤즈볼라와 하마스 또한 오랜 투쟁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승리해 권력을 장악했다. 냉전 종식 이후 평화통일에 성공했던 예멘에서 다시 내전이 발발한 주된 원인도 수니파 지배세력이 국가 통합에 실패한 데 있다. 또한 미국의 중동정책은 수니파 이슬람국가(IS)의 세력 확장에 기여했고, 이란은 이들을 퇴치한다는 국제 공조의 하나로 시리아에 병력을 보냈다.
모든 것을 따져봐도 이란이 중동을 장악하기 위해 팽창을 시도해왔다는 증거는 없다. 지난 10여년 동안 가혹한 국제 제재에 시달려온 이란이 그런 역량을 갖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란이 서유럽 절반 크기의 영토와 8천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강국이긴 하지만, 미국과 유럽이 눈을 부릅뜨고 있고 사우디·터키·이집트·이스라엘 등 다른 강국이 각축하는 중동에서 패권을 꾀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다.
악의 축은 선의 축을 합리화하고 강화하기 위한 마니교적 기획이다. 이런 시도는 이라크 침공 직전의 상황을 연상시킨다. 당시 조지 부시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을 주요 근거지로 한 탈레반이 9·11테러를 일으켰는데도 이라크를 제1 주적으로 부각했다. 이라크가 핵무기를 개발해 세력 확대를 꾀한다는 허위 정보를 대대적으로 유포한 뒤 국제사회의 반대 속에서 침공을 감행했다. 네오콘과 기독교 우파, 유대인 강경파는 이라크를 민주기지로 삼아 새 중동 질서를 만들려고 했으나 이후 중동 상황은 더 나빠지고 복잡해졌다.
15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이란을 새 주적으로 설정해 새 질서를 외친다. 이를 밀어붙이는 세력은 당시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근본주의적 사고와 일방주의 행태도 그대로다. 허위·과장 정보를 바탕으로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한 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체제 교체(regime change)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방식도 판박이다.
물론 역사가 같은 모습으로 되풀이되지 않듯이 결과까지 동일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지형 조건으로 볼 때 국지전이라면 몰라도 전면적인 대이란 군사작전을 벌이기는 쉽지 않다. 미국이 이미 핵협정 파기로 비난받는 터여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기는 더 어렵다. 트럼프 정부의 공언처럼 이란에 대해 ‘역대 최강의 제재’를 가하는 일도 간단치가 않다.
이란은 미국보다 유럽 쪽과 더 많은 경제 관계를 갖고 있다. 미국이 무리하게 제재를 강화하면 유럽 나라들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유럽이 미국에 맞설 경우 미국은 거꾸로 중동에서 주도력을 잃을 수 있다. 만약 달러 중심의 석유 거래 체제가 흔들린다면 미국의 패권이 급격히 기울어질 가능성도 있다.
미국이 말하는 이란의 체제 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호하다. 핵협정을 체결한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정권은 중산층의 지지를 받는 온건 개혁파다. 이들은 이란에서 미국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꼽힌다. 하타미 정권이 무너지면 강경파가 전면에 등장해 대미 대결을 강화할 것이다. 체제 교체가 안정적인 친미 정권의 수립을 의미한다면, 지금 이란에서 그런 세력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외정책을 힘있게 추진할 힘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중동정책은 미국 내에서 거의 타협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당파적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지금의 정책이 추진되는 것이긴 하지만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지면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중동 상황의 악화는 한반도에 분명히 영향을 준다. 전쟁 시작과 더불어 편가르기가 강요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파병이 거론되고, 이란을 비롯한 중동 나라들과의 경제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아랍에미리트와의 군사협력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대처도 더 어려워진다. 중동에 온 힘을 쏟는 미국이 다른 곳에 세심하게 신경을 쓸 여유는 없다.
‘유섹시트’(USexit)라는 신조어가 있다. 미국의 이란 핵협정 탈퇴를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빗댄 말이다. 지구촌이 미국의 일방적 중동정책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중동대전의 그림자는 더 짙어질 것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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