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감의 기저에 도사린 핵심은 결국 권위주의 아닐까. 이를테면 이런 것. “공손히 한 표 달라 해도 줄까 말까인데, 어디 나이도 어린 계집애가 감히 되바라지게!” 그 멘탈리티는 오랫동안 당연시되어온 ‘정치인 머슴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사회비평가 “1920년대 이른바 계몽주의 모더니즘 여성 삘이 나는 아주 더러운 사진을 본다. 개시건방진. 나도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다. 그만하자. 니들하고는.”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신지예씨 포스터를 두고 변호사 박훈씨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글을 보는 순간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 격렬한 반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평소 박훈 변호사는 진보 성향 인사로 알려졌기에 더 의아했다. 그는 나중에 ‘사과문’을 올렸지만 내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나도”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반감을 드러낸 사람은 박 변호사만이 아니었다. 신지예 후보의 포스터는 서울 시내 곳곳에서, 특히 강남에서 숱하게 찢겨나갔다. 무엇이 그들의 ‘버튼’을 눌렀을까? 저 집단적 반감의 심층에 도사린 멘탈리티는 무엇일까? 가장 쉬운 대답은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라는 문구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일단 손사래 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벽보를 찢은 사람들 중 일부는 정말로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싫어 그런 짓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박훈 같은 이의 반응은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페미니즘의 대의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시건방”지다고 했다. 요컨대 그는 텍스트로 된 메시지, 공약 따위에 반응한 것이 아니다. 포스터 속 후보의 이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선거 벽보를 훼손한 사람 일부도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지 모른다. 이제 논의는 도상학적 차원으로 넘어간다. 신지예 후보 사진, 한눈에도 평범하진 않다.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을 연출하려 발버둥 치는 여타 후보들과 전혀 다르다. 쇼트커트 머리에 단정한 흰색 셔츠를 입었는데 몸은 정면을 향한다기보다 옆을 향했다. 고개를 틀어 정면 쪽으로 돌렸지만 글자 그대로 살짝 틀었을 뿐이라서, 나란히 서서 걸어가는 친구를 흘깃 보는 느낌이다. 웃고 있으나 해사한 웃음이라기보다 자신만만한 미소에 가깝다. 여성 후보 사진의 경우 안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신 후보는 사각 형상의 금속테 안경을 썼다. 박 변호사가 말한 “1920년대 이른바 계몽주의 모더니즘 여성 삘”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짐작하건대 소위 ‘모단걸’(毛斷girl, modern girl)을 가리킨 게 아닐까 싶다. 머리를 짧게 자른, 현대적 사고방식과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했던 여성들. 그러고 보니 100년 전 경성의 신여성들이 이랬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아주 더러운 사진”이란 소릴 들어야 할 이유라도 되는가?
신지예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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