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원
사회2 에디터
영국 연수 시절 내가 살던 집은 지은 지 90년이 넘은 건물이었다. 대학교수였던 집주인은 내게 “이 동네에서는 비교적 새 집”이라고 자랑했다. 그 도시에서 거처를 구할 때 알아본 집 가운데는 지은 지 300년이 넘은 집도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났지만, 사는 데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영국에서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렇게 오래된 집에서 살았다. 내가 살던 도시에서는 최근에 지은 집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집엔 지붕 위에 굴뚝이 서 있었는데, 이것은 이 집들이 보일러와 히터가 보급되기 전에 지어졌다는 뜻이다. 내가 살던 집에도 굴뚝이 있었고, 다이닝룸(식사실)엔 벽난로 자리가 남아 있었다.
물론 영국 사람들이 사는 오래된 집은 처음 지어졌을 때의 상태는 아니다. 처음 집을 지은 주인부터 현재 주인까지 수십, 수백년 동안 그 집들을 계속 고쳐왔기 때문이다. 벽난로 대신 보일러를, 등불 대신 전깃불을 놓았고, 문과 창틀, 지붕 기와를 계속 바꿔왔다. 그래서 집의 구조와 외관은 옛 모습이지만, 내부 시설은 현대적이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도시재생 전문가인 김정후 박사는 “영국 건축가들은 새 집을 지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농담했다. 영국 사람들이 옛집을 고쳐가면서 살기 때문에 건축가들이 새 집을 지을 일이 없다는 뜻이다. 김 박사도 오래된 집에서 장기주택담보대출 상환금보다 더 비싼 집세를 내고 살았다. 김 박사는 굳이 집을 사지 않는 이유를 “오래된 집이라 관리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얼마 전 서울 용산구 용산역 앞 재개발구역 안의 4층 건물이 무너졌다. 폭발이나 화재가 없었는데도 건물 전체가 갑자기 넘어졌다. 이 건물은 1966년에 지어진 것으로 내가 경험한 영국의 건물들보다 훨씬 젊다. 그런데 한국에선 이 건물을 지은 지가 너무 오래돼 무너졌다고 생각한다. 이 집의 안전관리 책임은 집주인한테 있었다. 관할 용산구청은 이 건물의 위험 징조 신고를 받고도 집주인에게 적절한 조처를 요구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오래된 건물은 낡고 위험하다는 인식이 강하다. 물론 오래되면 당연히 낡고 위험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만약 한국의 집주인들이 영국인들처럼 관리했더라도 그 건물들이 낡고 위험해졌을까? 잘 관리해왔다면 한국의 집들도 영국의 집들처럼 몇백년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한국에선 건물이 오래되면 부수고 새로 짓거나 그 건물을 포함한 그 지역 전체를 싹 쓸어버리고 재개발한다. 노후한 건물이 많아야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기 쉽기 때문에 많은 주인들은 집과 건물을 방치한다.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면 어차피 부술 건물이기 때문에 계속 방치한다. 재개발구역 지정 뒤엔 보상 문제 탓에 증개축도 제한된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의 오래된 도시 지역에선 낡은 건물뿐 아니라 멀쩡한 건물까지 일시에, 모조리 부수고 고층 아파트나 주상복합건물을 짓는다. 그리고 한 세대(30년) 정도가 지나면 그 건물이 낡았다며 방치와 재건축의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오래 살아온 집이나 동네에 대한 애착이나 책임감, 자부심 같은 것은 없다. 이 메커니즘의 가장 강력한 동력은 돈이다.
얼마 전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별칭은 엠비(MB)였다. 그가 구속될 때 사람들은 ‘엠비’가 ‘머니 버그’(money bug, 돈벌레)의 준말이라고 조롱했다. 그게 맞다면 ‘엠비’를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은 무엇인가? 그 사람들은 ‘엠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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