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나라들은 중동·아프리카·중남미 나라들을 지배하면서 착취하고, 국내 모순을 이들 나라에 전가해왔다. 지금 이들 나라의 젊은이들은 계속되는 국내 갈등과 혼란에 좌절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구로 향한다. 이들에게는 낯선 곳보다 미운 정이라도 있는 나라가 낫다. 서구가 이들을 거부하는 것은 근대 이후 자신의 역사에 눈을 감는 것과 같다.
이주민 문제는 산업화 이후 서구 정치의 기본 틀인 계급 갈등을 대체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종주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모든 잘못을 이주민 탓으로 돌리는 국수주의 또는 변형된 제국주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사태가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고착될 조짐도 보인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타락이다.
“독일이 난민을 받기 시작한 이래 전체 범죄가 10% 이상 늘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이에 대한 공식 발표를 원하지 않는다. 다른 나라들은 더 나쁘다. 똑똑한 미국인이 되자! … 국경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 …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언제나 체포해야 한다. … 세계적 범죄조직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와 나쁜 짓을 하는데도 민주당은 불법 이민자들과 그로 인한 범죄에 신경을 안 쓴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탈리아 전역에 있는 60만명의 미등록 난민을 추방하겠다. … 이탈리아에 사는 집시들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할 계획이다. 법적 권리가 없는 외국인 집시는 다른 나라와의 합의를 거쳐 송환하겠다.”(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내무장관 겸 부총리)
■ 두 사람의 최근 발언은 ‘이주민 문제’와 관련한 미국과 유럽의 정치 담론이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주민은 이민자와 난민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문제를 철저하게 국가 안보(안전)와 관련된 사안으로 본다. 안보 사안으로 규정하면 초법적 대응을 합리화할 수 있다. 9·11 동시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애국자법을 제정해 시민의 자유권을 제약했듯이 기존 법률의 한계를 뛰어넘는 조처가 가능하다. 그는 이주민 범죄와 관련한 ‘가짜 뉴스’도 서슴지 않는다. 그에게 불법 이민자와 많은 난민 신청자는 ‘나라의 적’이다.
살비니 장관은 그 적의 범위를 오랫동안 국내에 살아온 소수인종에까지 확대한다. 13만∼17만명에 이르는 이탈리아 내 집시 인구 가운데 절반 정도는 이탈리아 국적이 없다. 그의 발언은 2차대전 이전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이 유대인을 추방하기 위해 취했던 조처를 연상시킨다. 살비니 장관 역시 트럼프 대통령처럼 자국민의 안전을 앞세운다. 하지만 인종에 기초한 인구조사는 헌법에 어긋난다. 유럽연합 또한 인종 기준에 따라 유럽 시민을 추방하는 것을 금지한다.
■ 이주민 문제는 역사적·정치적 성격을 갖는다. 먼저 국제이주기구(IOM)와 유엔난민기구(UNHCR)의 최근 통계를 살펴보자.
지구촌 이주민 수는 2억5770만명에 이른다. 세계 인구의 3.4%에 해당한다. 이 비율은 수십년 동안 3% 안팎에 머물다가 최근 조금씩 높아지는 추세다. 이주민은 출생국이 아닌 지역에서 12개월 이상 거주한 사람을 말한다.
이주민이 가장 많은 나라는 미국(4980만명)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독일(각각 1220만), 러시아(1170만), 영국(880만)이 그다음이다. 이 다섯 나라가 전체의 40% 가까이 차지한다. 이들 외에 미국에는 1130만명, 유럽에는 800만명의 불법체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이주민 중 난민은 10% 정도인 2540만명이다. 난민은 “인종, 종교, 민족,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해 국적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아 국적국 밖에 거주하는 사람”(유엔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이다. 넓은 의미의 난민인 강제이주자는 이들에다 비호신청자, 귀환민, 국내실향민 등을 더해야 한다. 모두 합치면 6850만명이다. 2차대전 때(5천만명)보다 많은 사상 최대 규모다.
난민은 1980년대부터 늘고 있다. 70% 이상이 6개 나라에서 발생했다.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남수단, 미얀마, 소말리아와 유엔의 별도 관리를 받는 팔레스타인이다. 최대 난민 배출국은 8년째 내전이 계속되는 시리아다. 팔레스타인(500만)보다 많은 난민(600만)에 더해 국내실향민도 600만명이나 된다.
■ 이주민의 역사적·정치적 성격은 이들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주민은 대부분 이웃 나라나 과거부터 관련이 깊은 나라로 향한다. (2차대전 이후 독일이나 카타르·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처럼 적극적으로 해외 노동력을 유치한 경우는 예외에 속한다.) 개도국에서 다른 개도국으로 가는 경우가 37%로,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는 비율(35%)보다 높다. 해외 이주민의 3배에 이르는 국내 이주민을 더하면 개도국 내 이동 비율은 더 높아진다. 난민 또한 85%는 선진국이 아니라 개도국에, 80%는 부근 나라에 머문다. 시리아와 이웃한 터키(350만)가 최대 난민 수용국이다. 에티오피아·케냐·우간다 등 동아프리카의 세 나라에도 280만명의 난민이 살고 있다. 유럽에는 이만한 나라가 없다.
이주민이 멀리 갈 경우 우선 생각하는 곳은 과거 식민종주국이나 정치·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나라다. 난민은 더 그렇다. 최대 난민 배출국 모두 근대 이후 서구의 지배와 개입이 일상화했거나 식민주의의 상흔이 짙은 곳이다. 6개 나라 가운데 4곳이 이슬람권이다. 지금 미국 남쪽 국경을 통과하려는 중남미 난민의 주류는 ‘캐러밴’으로 불리는 온두라스·과테말라·엘살바도르 사람이다. 미국은 이들 나라에 지속해서 개입해왔다. 최악의 정치 위기를 겪는 온두라스의 경우 미국이 조종해 민선 정부를 뒤엎은 2009년 쿠데타가 그 배경에 있다.
서구 나라들은 중동·아프리카·중남미 나라들을 지배하면서 착취하고, 국내 모순을 이들 나라에 전가해왔다. 이 지역 나라들은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한편으로는 협력했다. 냉전 시절이었다면 이들 나라의 젊은이들은 반군이 되거나 서구 나라를 본떠 조국의 근대화를 꿈꿨을 것이다. 독립 이후 수십년이 지났으나 이들 나라의 발전 수준은 여전히 서구에 비해 낮다. 세계화 시대인 지금 이들은 계속되는 국내 갈등과 혼란에 좌절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서구로 향한다. 이들에게는 낯선 곳보다 미운 정이라도 있는 나라가 훨씬 낫다. 서구가 이들을 거부하는 것은 근대 이후 자신의 역사에 대해 눈을 감는 것과 같다.
■ 이주민 문제는 지난 수십년 동안 서구 정치에서 무시하지 못할 사안이었다. 냉전 종식 이후 거세진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 속에서, 자본과 상품에 이어 사람의 이동이 늘고 이와 관련한 문제 제기가 이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주민을 적대시하거나 이주민 문제를 부각해 정치적 이익을 꾀하려는 세력은 극우파로 분류돼 주류 정치에서 배척됐다.
최근 몇 해 동안 사정이 달라졌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를 계기로 이주민 문제가 서구 정치를 좌우하는 최대 이슈가 됐다. 당시 시리아 난민이 급증하면서 수십만명이 한꺼번에 육로와 해로를 통해 유럽 남부와 동부로 몰려들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까지 발생했다. 이후 극우세력에 대한 지지가 늘고 이탈리아와 헝가리 등 몇몇 나라에서는 권력이 극우 쪽으로 기울었다. 2016년 통과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에서 최대 이슈가 이주민 문제였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반이주민·반이슬람을 내세우고 당선됐다.
이주민 문제에 대한 정면 대응을 회피해온 기존 주류 정치세력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새 해법을 내놓거나 극우 논리를 상당 부분 받아들여 정책화해야 할 처지다. 유럽과 미국의 분위기는 후자 쪽으로 기운다. 정치권 전체의 우경화 흐름이 뚜렷하다.
이주민 문제는 이제 산업화 이후 서구 정치의 기본 틀인 계급 갈등을 대체하고 있다. 불평등 또는 계급 갈등 문제가 이주민 문제를 통해 표출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인종주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모든 잘못을 이주민 탓으로 돌리는 국수주의 또는 변형된 제국주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사태가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고착될 조짐도 보인다.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타락이다.
■ 지금의 이주민 문제는 북쪽(서구)과 남쪽(제3세계) 사이의 오랜 모순이 폭발한 것이다. 서구 대중은 이를 ‘남쪽의 반격’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문제의 뿌리를 인식하고 근원적 해법을 찾는 게 올바른 태도다. 역사적·정치적 책임을 회피한 인종주의는 더 심각한 상황을 낳을 뿐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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