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2부문장 요즘 혁신성장이 문재인 정부의 당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일자리 정부를 표방하고 나섰으나 정작 올해 일자리 목표치가 32만개에서 18만개로 줄어들 만큼 사정이 절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이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전격적으로 만나 일자리 창출을 당부하고, 의료기기 관련 규제 완화를 독려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접근법으로는 혁신을 달성하긴 쉽지 않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규제를 ‘암덩어리’로 규정하며 대대적인 규제완화를 폈지만 효과는 신통찮았다. 그렇다면 조지프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와 같은 혁신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미국 실리콘밸리와 스웨덴 스톡홀름 두 곳을 사례로 들고 싶다. 10여년 전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캐피털을 방문했을 때 달러를 태우는 장면을 형상화한 이미지가 현관에 내걸려 있었다. 벤처 투자 자금이 넘쳐나는 것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벤처캐피털은 단지 투자에만 그치는 게 아니었다. 창업가의 사업 아이템을 성공시키고자 인재 영입부터 마케팅, 재무까지 거의 모든 것을 원스톱 서비스 해줬다. 빌 게이츠나 마크 저커버그 등이 대학을 중퇴하고 과감하게 창업에 나서는 것은 이런 생태계가 갖춰져 있기에 가능하다. 보편적 복지를 위해 많은 세금을 걷는 스톡홀름을 사례로 드는 것에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톡홀름은 유럽지역 기술부문에 대한 외국인 직접투자의 15%나 유치하는 곳이다. 기업가치 10억달러(약 1조1천억원)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을 뜻하는 ‘유니콘’ 기업 수는 인구 대비로 세계 2위다. 인구가 90만명에 불과하지만 스카이프, 스포티파이 등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세계 최대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 스포티파이의 창업자 다니엘 에크도 대학 1학년 때 중퇴하고 창업 아이디어의 사업화에 나섰다. 두 도시는 경제모델이 전혀 다르지만 혁신이라는 관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뛰어난 인프라를 바탕으로 젊은이들이 ‘리스크 테이커’(위험 감수자)가 되어 불확실성이 매우 큰 창업에 뛰어든다는 점이다. 그 인프라의 상당부분은 국가와 대학 등이 제공한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첨단 기술들은 애초 정부의 막대한 연구개발·군사기술 투자에서 비롯됐다. 스톡홀름에선 국가의 폭넓은 사회안전망 제공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창업 실패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위험 감수 의지는 매우 약화돼 있다. 개발연대 시기 ‘정권-관료-재벌’ 주도의 위험 분담 체계는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무너졌다. 이후 치열한 생존 경쟁에 내몰린 경제주체들이 너도나도 ‘위험의 외주화’에 나서면서 중소기업 종사자, 비정규직 등 약자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졌다.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복지 강화 등은 이런 비정상의 정상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혁신성장을 위해선 불필요한 규제의 철폐도 긴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경제주체들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태도를 보이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정부는 우선 창업에 실패해도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폭넓은 사회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소요되는 재원 마련을 위해선 증세가 필요한데, 현 정부로선 총선 일정을 고려하면 올해가 거의 마지막 기회다. 또 재벌들의 문어발식·갑질 경영 행태를 뿌리뽑아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감시에 나서고 있으나 중소기업들은 지금도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 하소연한다. 지난 대선 때 ‘범정부 차원의 을지로위원회’ 출범을 공약했다는 점을 정부는 잊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정부는 연구개발 투자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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