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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잡아줄 사람 / 이지은

등록 2018-11-11 18:00수정 2018-11-12 09:07

이지은
정치사회 에디터

1997년 12월30일은 마지막 사형 집행일이다. 이튿날치 <한겨레신문>은 “23명 사형 15년 만에 최대 규모”라는 기사를 사회면에 실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추웠다. 수습기자로 새벽부터 밤까지 헤매고 다니던 거리엔 실직자와 노숙인이 넘쳤다. 생계가 끊어져 절망하는 사람들 앞에서 흉악범의 끊어진 생명에 관심을 둘 이유가 내겐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사형제 폐지론자가 됐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오판 가능성만으로도 폐지 근거는 충분하지 않은가. 영화 <데이비드 게일>(2003년, 스포일러 있음)에서 사형 폐지 운동단체 회원인 주인공은 이 오판 가능성을 자기 목숨으로 증명해낸다. 같은 회원이자 친구인 여성을 잔인하게 죽이고 6년의 수감 뒤 사형을 당하는데, 알고 보니 시한부 선고를 받은 친구와 짜고 자살을 살인으로 꾸민 것이다.

2004년 무렵 17대 국회 때 여성 기자 몇몇이 유인태 의원과 저녁을 먹었다. 그는 평소 농담 같은 진담을 잘했고, 나는 그것이 한때 사형수였던 이의 해탈같이 느껴져 좋았다. 그가 인혁당 사건으로 1975년 사형당한 선배 여정남씨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고, 몇몇은 눈가를 훔쳤다. 나는 좀 멍했다. ‘독재 정권의 사법 살인’인 인혁당 ‘사건’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겪은 ‘사람’들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던 거다. 여정남 31살, 유인태 27살 때 일이다.

오판 가능성 때문이든, 정치적 악용 때문이든 사형제는 없어져야 마땅했다. 그런데 ‘죽을죄’를 지어 사형수가 된 이들을 생각하면 솔직히 한숨만 나왔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다는 말은 맞는데 ‘너도 인간이냐’ 싶고, 속죄의 삶을 살 기회를 줘야 한다는 주장엔 ‘피해자는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급기야 “이런 ××들은 사형시켜버려야 해”라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2016년 친부와 계모가 아이를 죽여 암매장해놓고 실종 신고를 했다. 공개수배 전단지에서 ‘신원영, 8세’ 그리고 천진한 얼굴을 본 순간 엄청난 분노가 솟구쳤다. 내 아이와 동갑인 원영이는 오랜 학대 끝에 화장실에서 락스 세례를 받다 숨졌다. 그들 말고도 ‘죽일 놈’은 많았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치열하게 고민하는 게 사실이다.” 가수 이은미씨는 최근 <한겨레>가 연재한 기획기사 ‘사형제, 폐지할 때 됐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인권위 사형제 폐지 명예대사를 맡은 게 “사형제 폐지에 100%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이 마음을 쿡쿡 찔렀다. 그동안 분노로 흔들리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분노를 쏟아내면서 흉악범들을 사형시키면 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했다.

무엇을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까. “유럽은 그들을 홀로 두지 않는다.” 이 기획기사에서 유럽의 사형 폐지 역사와 철학을 전한 미하엘 라이터러 주한 유럽연합(EU)대표부 대사가 범죄 피해자에 대한 더 많은 지원을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우리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지킬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다거나, 범죄 피해자들을 심리적·경제적으로 충분히 지원하고 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분노에 갇힌 내 마음은 범죄 피해자들을 홀로 두지 않는 일에 돌려야 한다.

사형제 폐지의 길이 평탄했던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한다. 여론은 늘 흔들렸고, 정부와 국회가 ‘올바른 입법’이라는 결단을 하면 여론이 따라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12월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에 ‘사형 집행 중단 선언’을 하는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길 바란다. 범죄 피해자의 고통을 보듬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약속도 함께 하면 좋겠다.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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