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신문> 편집국장 변방에 사는 수많은 무명씨가 있다. 어떤 고통은 기록되어 공유되지만, 존재하는지 모르게 소리소문 없이 스러져 가는 어떤 아픔들도 있다. 주목도와 평판에 따라 조직되는 뉴스들이 철저하게 외면하는 소식들은 아무런 관심조차 받지 못하고 소멸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아픔을 서열화하자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대신 고통에 대한 공감의 형평성을 말하고자 함이다. 기자들의 거주지와 활동반경에 따라 뉴스 가치는 충분히 왜곡된다. 방송사가 전파로 장악하는 수신자의 범위에 비해, 전국 어느 지역이나 동등하게 청구되는 수신료에 비해, 방송사의 서울 수도권 집중도는 이미 불평등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그럼에도 대표되는 사건의 부각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비슷한 사건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제도적 정비가 이뤄진다는 것은 긍정적이다. 날카로운 진실의 보도는 사회 분위기를 새롭게 환기하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게 하고 이로 인해 새로운 문화가 조성된다. 소리소문 없이 고통받아온 은밀한 성폭력에 대한 ‘미투’는 많은 파장을 낳은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용기 있는 고백이 나올 때마다 주목받는 것은 그 폭력들이 수십년 동안 은밀하고 일상적으로 진행됐고, 그것의 방임에 대한 미안함과 성찰이 곁들여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리스트인 심석희 선수의 ‘미투’는 또 다른 충격을 안겨줬고 여론의 주목도만큼 경찰이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으며 초당적으로 ‘폭력이나 성폭력을 저지른 체육지도자를 영구 제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체육계폭력방지법 제정까지 공론화되는 상황이다. 9일 열렸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1심 재판부의 무죄선고를 비판하며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4년을 구형했다. 이 사건도 언론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옥천신문>에 2017년 12월에 보도되었던 초등학생 때부터 양아버지 노릇을 하던 마을 이장에게 지속적인 성폭행과 임금 갈취를 당했다고 고백한 한 지적장애인의 말들은 2018년 말 청주지검 영동지청에 의해 ‘불기소 처분’으로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조사해본 결과 위계나 위력에 의한 성폭행이나 성추행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검찰의 입장이었다. 남성과 여성, 양아버지와 딸, 장애인과 비장애인, 스무살 차이가 넘는 나이 등 우리 사회의 일상적인 위계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 과정에서 위계와 위력을 찾지 못한 검찰이 의아스럽다. 이 사건을 전해들은 지역의 한 인권활동가는 아프게 묻는다. ‘피해자인 그가 만일 검사였다면 금메달리스트였다면 이런 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을 것인가. 만일 이것이 9시 메인뉴스에 언급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고통에 대한 관심의 차별은 어떤 결정을 낳게 하는가.’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어렵게 끄집어낸 아픔을 다시 삭여야 하는 피해자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보도는 <옥천신문>이 보도하고 <청주방송>이 2018년 3월 두차례 보도했지만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다. 지난주 불기소 처분이 <옥천신문>을 통해 보도가 된 뒤, 많은 주민이 직접 전화를 주셨다. “어떻게 이런 결정이 가능한 겁니까. 재판조차 받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겁니까?” 왜 어떤 아픔들은 기록되지도 공유되지도 못하는가? 늘 그렇지만 취재하여 보도되어지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란 생각을 한다. 기록조차 되지 못하는 사건들, 기록되지만 관심 받지 못해 소리소문 없이 묻혀지는 사건들을 목도하면서 마음이 많이 아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방의 수많은 무명씨의 아픔이 보도조차 되지 못하고 사장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들리지 않는 목소리들에 자꾸 관심을 갖고 함께 목소리를 내려 할 때 세상은 조금 더 나아진 곳으로 발돋움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새해에는 더 이상 지역 변방이라는 이유로, 소수자라는 이유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라지는 그런 일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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