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한개의 상산고와 신분 사회 / 이재훈

등록 2019-07-07 17:49수정 2019-07-08 09:26

이재훈
24시팀장

2010년 9월 서울시교육청의 한 회의실. 초중고 각급 학교 교사, 빈곤 아동을 지원하는 지역아동센터와 대학생 교육봉사단체 간부 10명이 모였다. 경쟁에서 낙오한 ‘학습 부진아’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각자 한명씩 돌아가며 자신을 소개하고 처한 상황을 공유했다. 그런데 서울 강북에 있는 한 공립 특성화고 교사가 입을 떼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우리 학교는 하위 98~99% 학생들이 모인 곳입니다. 시험 문제를 내도 아무도 풀지 않습니다. 전교생이 320명인데 272명이 미달 점수를 받아요.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쓰레기’라고 부릅니다. 3학년이 되면 공장에 실습을 나가는데, 시급 4천원씩 받아요. 방학 때는 백화점 주차요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월 100만원씩 받지요. 우리 학교 교사들에겐 이런 말이 돕니다. ‘학생들이 뱉은 침에 미끄러진 적 없고, 학생들에게 욕설을 들어보지 않은 교사는 교육을 얘기하지 말라.’ 교사들이 아무도 우리 학교에 오지 않으려고 해서 저처럼 학교 선택권이 없는 젊은 교사들만 부임합니다.”

2010년은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에 중요한 분기점이 된 해다. 안 그래도 등급이 나뉘어 있던 학교가 유형별로 더 촘촘히 서열화됐다. 최상위권에는 1980년대 말부터 성적 상위권 학생들이 입학하기 시작한 외국어고와 과학고 등 특수목적고가 있고, 2010년부터 확대 설립된 자사고가 강남 8학군 일반계고와 함께 두번째 칸에 자리했다. 그 아래 강남 외 일반계고가 있고, 맨 아래 칸에 과거 실업계고로 불린 특성화고가 깔려 있다. 특성화고는 또 두 등급으로 나뉜다. 2010년부터 특목고로 지정된 마이스터고가 튀어나와 자사고와 강남 외 일반계고 사이 어딘가에 자리잡았다. 서열 상위권 학교는 정부의 지원과 학생들이 한해 1천만원은 거뜬히 내는 등록금으로 윤택한 학습 환경을 만들지만, 서열 하위권에 있는 일반계고와 특성화고는 강북의 저 교사가 말하는 것처럼 안팎의 멸시와 함께 붕괴해갔다.

지난 9년은 촘촘히 나뉜 학교의 서열이 사회적 신분으로 공고해지는 기간이었다. 지난 3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파업하자 파업 지지 선언을 한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이상현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특성화고 학생들도 졸업하면 비정규직이 되기 때문에 급식 어머님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숨진 19살 김군의 3주기를 앞둔 지난 5월26일, 전국특성화고졸업생 노동조합 정용필 조직팀장은 〈연합뉴스〉에 이렇게 말했다.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한 친구가 자기는 ‘떨이’로 팔려 다니는 것 같대요. 싼 물건을 찾듯이 고용시장에서 싼값에 사갈 수 있어서 자기 노동력을 사는 것 같대요.”

이 말들에는 서열과 신분이 공고화된 세상에 대한 체념이 담겨 있다. 10대 학생들이 자신의 미래가 ‘비정규직’임을 자연스레 얘기하고, 자신을 ‘쓰레기’나 ‘떨이’ 상품으로 칭하며 자조한다.

서열과 신분이 공고화된 세상이 만든 건 체념만이 아니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의 파업을 응원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한국도로공사의 자회사 고용 철회를 외치는 톨게이트 노동자의 파업을 두고 “능력도 없이 공채 티오(정원)만 빼앗으려 한다”는 비난을 쏟아내는 이들이 있다. 전북도교육청이 상산고의 자사고 지정 취소를 추진하자 “평가 기준이 불공정하다”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에 의하면, 이는 ‘계몽된 허위의식’이다. 이들은 사악한 현실을 타파할 참된 의식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이를 실행하지 않고 되레 그 현실에 편승해 더 아래쪽에 있는 이들을 억압한다. 그러니 이 의식은 알고 있지만 실행하지 않는 껍데기, 즉 허위다. 이 허위의식은 세상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에 기반해 작동한다.

어쩌면 이 체념과 냉소는 상산고 한곳을 지정 취소하는 것으로 전국의 수많은 서열화한 학교와 이 서열이 바탕이 된 신분 사회를 극복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건지도 모른다. 일개 교육청이 아니라 최소한 정부가 앞장서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na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최상목의 자기합리화…‘석열이형’에게 미안해서 [1월6일 뉴스뷰리핑] 1.

최상목의 자기합리화…‘석열이형’에게 미안해서 [1월6일 뉴스뷰리핑]

‘개같이 뛰고 있다’…쿠팡은, 국가는 무얼 했나 [6411의 목소리] 2.

‘개같이 뛰고 있다’…쿠팡은, 국가는 무얼 했나 [6411의 목소리]

비루한 엘리트들 [한겨레 프리즘] 3.

비루한 엘리트들 [한겨레 프리즘]

무너진 사법 위에 법치를 세울 수 있는가 [세상읽기] 4.

무너진 사법 위에 법치를 세울 수 있는가 [세상읽기]

쿠데타 군대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김연철 칼럼] 5.

쿠데타 군대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나? [김연철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