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뉴스팀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선 유세 때부터 ‘미국 우선주의’를 전면에 내걸었을 때, 현실에서,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될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았다. 올해 초 한-미 간에 타결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도 애초 우려했던 것보다는 비교적 선방했다고 개인적으로는 평가한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일방적 우선주의로 곳곳에서 시끄러웠지만,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미국 우선주의’의 최대치는 지난해부터 격화된 미-중 무역전쟁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올해부터는 ‘미국 우선주의’의 여파가 예상을 뛰어넘어 훨씬 폭넓게 동북아를 덮치고 있다. 미국이 패권 유지를 위해 내세웠던, 이른바 세계경찰이라는 국제사회의 ‘공공재’ 역할을 포기하면서다. 미 국무부 고위당국자 4명은 이달 초 방콕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 뒤 연 기자 브리핑에서 한-일 갈등과 관련해 “중재나 조정에 관심이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책임은 지지 않으려 하면서 제 잇속은 빠짐없이 챙기는 얍삽한 직장상사를 보는 느낌이랄까. 그나마 이런 솔직함이 트럼프 행정부의 미덕이라면 미덕이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은 냉전 종식 이후 굳어졌던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를 트럼프 행정부가 거부하면서 그 틈새를 비집고 나왔다. 미국의 아시아 동맹 관리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미, 미-일 동맹이 바큇살을 구성하는 ‘허브 앤 스포크’ 시스템으로 이뤄져 있다. 최정점인 허브의 구심력이 약해지면 바큇살들의 ‘질서’는 흐트러진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체제에 대해 현상변경 욕구를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의 현상유지 욕구 간 정면충돌을 막는 방화벽 구실을 했던 것도 미국의 헤게모니 장악이었다. 미국이 병마개를 누르는 힘이 약해지자 일본은 65년 체제의 현상변경을 시도하는 한국에 초강수를 던졌다. 어릴 적 국어사전을 찾아보며 열심히 탐독했던 무협지 표현을 빌리면, 첫 초식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3대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라는 ‘살수’를 들이밀었다. 상대방을 일거에 제압해 굴복시키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미국이 동북아에서 근육질을 과시하던 지난 시기라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지난달 23일 ‘첫 장거리 연합 초계비행’ 훈련을 하면서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카디즈)에 진입하고 러시아의 A-50 조기경보통제기가 독도 영공을 ‘침범’한 사건은 어떠한가. 카디즈 진입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독도 영공 침범은 러시아의 초강수다. 많은 전문가들이 6월1일 미국 국방부가 펴낸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를 사건의 발단으로 꼽지만, 그렇다손 치더라도 ‘말 대 행동’이어서 비례성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 보고서는 ‘말’이고 영공 침범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행동은 미국의 개입을 예상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도발’로, 미국 헤게모니의 쇠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약한 고리인 한국을 통해 간보기를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과 러시아의 연합훈련 내용도 미국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중·러 폭격기가 동해에서 합류한 뒤 다시 남중국해 방향으로 함께 이동했다. 동해에서 무력분쟁 발생 시 공동대처를 상정하고 있고, 동중국해나 남중국해에서도 연합전선을 펼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는 동중국해나 남중국해로 가기 위해 길목인 동해를 반드시 거쳐야 하고,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카디즈를 무력화시켜 놓아야 한다. 미국의 일극체제 쇠퇴는 국제사회에서 각자도생,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예고한다. 한-일 갈등은 한쪽이 확실하게 힘의 우위에 서기 전에는 반복적으로 재발할 개연성이 높다. 러시아와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더욱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이나 러시아가 예상하지 못했던 강력한 반격을 통해 초반 방어는 상당히 선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제 1라운드만 끝났을 뿐이다. ‘합종연횡’ ‘이중 플레이’ ‘필살기’ 등 그동안 일극체제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던 초식들을 준비해야 한다. 진짜 외교력은 이제부터 필요하다. yy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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