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규
신문콘텐츠부문장
한국의 교육 문제는 보면 볼수록 ‘두더지 잡기 게임’을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를 해결하나 싶으면 다른 문제가 불쑥 튀어나온다. 단순하고 투명한 입시를 위해 대학수학능력시험 비중을 높이면 공교육이 황폐화하고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진다. 교육의 중심을 학교로 되돌리려 내신 위주의 입시를 도입하면 옆자리 친구가 경쟁자가 되어 교실이 지옥으로 변한다. 다면적인 평가를 하겠다며 입학사정관 전형을 들여왔더니 이번엔 불투명성과 과도한 준비 부담 탓에 다들 아우성이다. 그동안 숱하게 제도를 바꿔봤지만 뭐 하나 나아진 게 없다. 제도가 바뀔 때마다 골탕을 먹는 쪽은 늘 비빌 언덕 없는 흙수저들이다.
이처럼 처방이 번번이 빗나가는 이유는 교육이 수많은 이들의 욕망과 어지럽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교육은 숭고한 배움의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 획득을 위한 아귀다툼의 장이다. 가진 자들은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하려 가용 자원을 아낌없이 교육에 쏟아붓는다. 서민들도 자식에게만큼은 좀 더 나은 삶을 물려주고 싶어서 마른 수건을 쥐어짠다. 근래 들어 사회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공포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더욱이 교육당국은 지금껏 욕망을 냉각시키기는커녕 외려 부추기는 정책을 펴왔다. 외고·자사고 등 특권적 지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학교를 늘려온 게 대표적이다. 이렇다 보니, 사람들은 대체로 욕망이라는 프리즘으로 교육을 바라본다. 내 자식에게 유리한지 여부가 중요할 뿐, 교육적 가치는 뒷전이다. 아무리 이상적인 제도를 도입해도 어디선가는 격한 반대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죽하면 교육부 고위 간부가 퇴임하면서 ‘한국 교육은 신이 내려와도 풀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탄했을까.
최근 ‘조국 사태’ 와중에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자주 들려온 말이 ‘진보의 이중성’이다. 하지만 어디 조국 장관뿐이랴. 나는 그동안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언론계 동료나 취재원 중에서 교육에 관한 한 ‘위선자’들을 숱하게 봐왔다. ‘진보’를 입에 달고 살면서, 자식이 학교에 들어갈 무렵이면 슬그머니 강남으로 이사를 가고, 외고 진학을 목표로 조기 유학을 보내는 것은 너무 흔해서 얘깃거리도 못 된다. 외고의 명문대 싹쓸이 실태를 비판하는 기사를 쓴 동료 기자에게, 외고 학부모로서 이기적 정체성을 숨기지 못한 채 ‘배배 꼬였다’거나 ‘그게 뭐가 문제냐’는 투의 힐난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면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교육이 참 난제 중의 난제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풀기 어려운 문제일수록 근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교육 문제의 근원은 학벌에 따른 차별적인 보상 시스템이다. 19살 무렵 취득한 대학 간판이 평생 가져다주는 보상은 실로 크다. 채용부터 승진, 임금, 사회적 인정, 인적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생애 주기에 걸쳐 ‘학벌 프리미엄’의 영향을 연구한 논문과 보고서는 차고 넘친다. 꼭 엄밀한 연구 결과가 아니더라도 부모들은 경험적으로 안다. 학벌에 따른 차별 대우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최근 몇 년 새에도 시중은행과 공공기관, 로스쿨 등에서 선발 시험 때 출신 대학에 따라 점수를 달리 매기는 ‘대학 등급제’를 적용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고교와 대학이 층층이 서열화되어 있고 그 서열에 따라 차별적 보상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대입은 사회적 지위 획득을 위한 전초전이고 고입은 대입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다. 격렬할 수밖에 없다. 싸움의 규칙을 손본다고 이 지옥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 좀 더 담대한 발걸음을 내디뎌보자. 이번 ‘조국 사태’를 계기로 특권 대물림 해체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된 듯하니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보수 언론에서도 ‘금수저 특혜’와 ‘흙수저의 박탈감’이 거론되는 걸 보면 반갑기까지 하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마침 교육부도 고교·대학 진학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특권층에 유리한 제도를 개혁하겠다고 천명했다. ‘기회의 평등’에서 한발 더 나아가 ‘결과의 평등’까지 챙기겠다는 의지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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