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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민주당에 드리운 위험한 침묵 / 석진환

등록 2019-10-30 16:55수정 2019-10-31 07:59

석진환 정치팀장

평소 한 성깔 하는 지인의 카카오톡 프로필 화면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 후련하다가 찝찝해지고/ 하고 싶은 말을 안 하면, 답답하다가 잘했다 싶고’

누구한테 또 심한 말을 퍼붓고 후회했거나, 불같은 성격을 탓하며 격언 삼아 적은 글이겠거니 짐작했다. 어쨌거나 곱씹을수록 와 닿는 내용이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지난 26일치 <한겨레>에 실린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 인터뷰는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불출마를 선언한 초선 의원이 당내 최다선(7선)의 이해찬 대표를 작심하고 공개 비판했으니 그럴 만했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말을 거침없이 쏟아낸 이 의원은 지금 어떨까. 후련하다가 스멀스멀 밀려오는 찝찝함을 느끼고 있을까. 이 의원과 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던 다른 의원들은 말을 아끼길 잘했다 싶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저 카카오톡의 짧은 글은 그저 우리 일상에서 참고할 만한 ‘지혜로운 처세술’일 뿐이다. 정치의 영역에선 무엇이든 말을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정치인의 ‘침묵’은 그 자체로 무능이자 책임 회피다.

말을 해야 바뀐다. 30일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기자간담회 일정을 일주일이나 앞당겨 조국 사태에 관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송구하다”고 밝힌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너무 늦은 사과였지만, 이마저도 이 의원을 비롯한 몇몇 초선의 공개적인 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작은 성과다.

다만 그 정도로는 원내 제1당의 변화를 끌어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민주당은 ‘말’에 관해,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위기 해법을 모색하겠다던 25일 민주당 의원총회의 ‘조용함’이 그런 증상 중 하나다. 민주당 의원들은 지금 집단적 침묵 모드다.

이철희 의원의 인터뷰에는 그런 침묵의 장면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두 문장만 소개하면 이렇다.

“지도부가 너무 안이하다. 조국 정국 이후 ‘뭔 일이 있었어?’라는 식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고 있다.”

“(당 대표가) 총선을 여러 번 치르면서 ‘내가 해봐서 안다’는 함정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의원들 다수가 당 지도부의 ‘뭔 일이 있었어?’라는 태도에 침묵했다. 이는 자신이 나쁜 평가를 받거나 고립되는 게 두려워 입을 다무는, 이른바 ‘침묵의 나선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사석에선 조국 사태의 심각성을 토로했던 이들마저 지도부와 적극적 지지층을 의식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해봐서 안다’는 지도부의 태도는 주로 기업에서 경계할 항목으로 꼽히는 ‘침묵 효과’에 가깝다. 침묵 효과의 가장 큰 폐해는 조직의 위로 갈수록 부정적 정보가 걸러지고 긍정적인 정보만 전달되는 것이다. 조직 내 여러 위험 징후가 과소평가될 수밖에 없다. 지금 민주당엔 지도부에 쓴소리하는 사람이 없다. 열린우리당 시절 분열이 뼈아팠다며 ‘원팀’만 강조되고, 그 결과 건강한 견제나 토론을 끌어낼 비주류 무리가 없다. 파편적으로 사석에서 불만을 표시하는 ‘샤이 비주류’만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나는 민주당 지도부와 의원들 상당수가 열성 지지층만 쳐다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닐까 싶다. 더구나 총선을 앞둔 현역 의원들은 예외 없이 당내 경선을 치러야 한다. 모든 유권자를 상대하는 본선보다 적극적 지지층이 많은 권리당원의 영향력이 큰 게 경선이다. 당내에서 쓴소리 혹은 딴소리를 했다가 적극적 지지층에 미운털이 박히면 생존이 쉽지 않다. 이걸 걱정하는 의원들을 꽤 봤다. 경선은 꼭 필요한 좋은 제도이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민주당을 지지했던 중도층이 조금씩 떠나기 시작한 지 꽤 됐다. 민주당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당내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지나고 난 뒤 문제를 깨닫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의 침묵이 집권 여당을 얼마나 시나브로 잠식할지 아는 게 어려운 일이다.

글 첫머리에 소개한 카카오톡의 문장이 사실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하상욱 시인의 시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의 짧고도 참신한 시를 더 찾아 읽다 보니 이런 시도 발견했다. ‘하기 힘든 말을 참으면, 참기 힘든 일을 겪는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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