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락 ㅣ 산업팀장
‘코로나19’ 사태 확산에 국내외 경기 위축이 확연하다.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 감염병 확산 방지에 들어갈 추가 재원 마련과 경기 대응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 필요성이 제기되더니 곧이어 정부가 편성에 착수했다. 올해 예산안이 집행된 지 채 2개월도 되지 않은 시점에 편성이 시작된 추경인 터라 정부로선 추경 사업 발굴과 규모 산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는 단서는 달려 있지만, 당·정·청은 5조원 수준의 세출 증액을
추경 밑그림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정부, 추경 편성 착수…코로나 5조 안팎 될듯) 과거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추경’을 기준 잣대로 삼았다고 한다. 당시엔 6조원 남짓 세출을 늘리는 추경을 했는데, 그중 메르스 관련 몫은 2조5천억원이었다. 메르스 때보다 관련 예산을 두배 증액한 점을 당·정·청은 강조하고 싶은 눈치다.
그러나 세출 증액 규모는 물론 그 판단 근거도 꽤 당혹스럽다. 메르스 추경이 있었던 2015년 당시 본예산 규모는 380조원 수준이었다. 메르스 대응에 들어간 예산만 떼어놓고 보면, 세출 증액 비중은 0.6% 수준이다. 당·정·청 밑그림대로 세출 증액이 5조원으로 확정되면 올해 본예산 기준으로는 그 비중이 0.9%에 그친다. ‘증액 두배’가 무색해진다. 지난 5년간 예산 규모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모수’가 메르스 추경 때보다 140조원 가까이 불어나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증액 두배’만 강조하는 것은 몸집이 커진 경제 환경을 간과했다는 평가를 낳을 수 있다. 게다가 길거리가 한산해질 정도로 물리적 이동마저 줄어든 점을 고려하면 자금 회전 속도도 줄어 경기 대응 효과성(재정 승수)도 메르스 때보다 낮아질 것이다.
비교 잣대가 메르스 추경인 것도 의아하다. 추경의 계기가 감염병이란 공통점은 있다. 하지만 그 파장은 확연히 다르다. 감염자 수도 다를뿐더러 지역 사회 감염으로 진화하는 등 감염 양상도 차이가 크다. 코로나19는 종식 시점도 가늠하기 어렵다. 확진자와 접촉한 사람만 나와도 사옥이나 영업장을 폐쇄하고, 대중교통 이용도 꺼릴 정도로 공포감도 크다. 경제활동 주체들이 ‘전례 없이’ 움츠러들었다는 얘기다. 여기에 감염병 발원지가 중국인 터라 중국과 공급망 사슬에 노출됐거나 중국이 주요 판매처인 기업들이 받는 충격도 메르스 땐 없던 일이다.
외려 이번 사태의 전개 양상을 보면 2008년 금융위기 때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파장의 강도는 다르더라도 양상은 그렇단 얘기다. 우선 2008년 당시에도 위기가 본격화되는 와중인데도 시장 참여자는 물론 정부도 그 심각성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한 예로 그해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보호신청을 할 때조차 코스피지수는 2% 내려간 뒤 곧이어 반등했다. 시장 참여자들이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을 토대로 만든 파생금융상품을 매개로 리스크가 세계 금융망에 넓고 깊숙이 퍼진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가 폭락은 한달이 더 지난 뒤였다.
재감염과 잠복기, 전파력 등 신종 바이러스의 속성은 마치 금융위기 초기 파생금융상품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규명되지 않았고, 공급망 붕괴와 생산 차질, 각종 행사 취소에 따른 불안정 일자리의 급격한 감소 등도 코로나19 발원 초기에는 예상 못 했던 파장이다. 금융위기가 경제의 심장인 은행 시스템을 붕괴시켰듯 코로나19는 동네 상점 등 경제의 실핏줄까지 타격을 주고 있다.
금융위기의 발생 원인과 그 대응 전략 등에 대한 논의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2008년 위기의 속성을 가리키는 수식어로 ‘언논 언논 크라이시스’(unknown unknown crisis)가 등장했다. 위기의 실상을 모르는지도 알지 못하는 위기라는 뜻이다. 이 표현만큼 금융위기의 속성을 잘 드러낸 문구는 보지 못했다.
금융위기가 정책 당국자에게 남긴 교훈 중 하나는 시장의 기대를 넘는 과감한 정책 대응이다. 맞서야 할 상대의 모습이 뚜렷하지 않고 그 파장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는 들고 있는 대응 수단을 아끼지 말고 활용할 궁리를 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모든 정책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대응하라”라는 메시지만큼은 온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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