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공감세상] 트루 디테일 / 손아람

등록 2020-05-13 17:48수정 2020-05-14 14:03

손아람 ㅣ 작가

“기술과 제품은 일류라는 찬사를 듣고 있지만 삼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따갑습니다. (…) 편법에 기대거나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지난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발표한 사과문에 사용된 표현들은 꽤 적절했다. 발표한 시기만 제외한다면. 시민사회가 오랫동안 기다려왔지만 조금도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시점에 발표된 이 사과문은, 매 맞기 전 급하게 써낸 반성문이 으레 그렇듯이 오로지 미래형 서술로만 뒤덮여 있다. 편법, 편법, 편법은 앞으로 없다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지만, 마치 평생에 걸쳐 수사술을 갈고닦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고안한 아이러니처럼 반성문 그 자체가 편법의 한 과정에서 튀어나왔다.

사과문은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로 발표됐다. 준법감시위원회는 양형에 반영하겠다는 법원의 권고로 결성됐다. 보기 드물게 관대한 법원의 배려는 특검이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재판부 기피 신청을 낼 만큼 이례적인 것이었다. 범죄 형량을 결정하는 유일하고도 막강한 소임을 법원이 포기하고 피고인의 자발적인 참회에 양형을 맡긴 행태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앞으로도 법정에 선 다른 범죄자들 역시 법에 따른 처벌을 받는 대신 자발적인 ‘준법 감시’와 ‘사과문 발표’를 선택해 처벌을 면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과문은 특혜이고 편법이다. 만약 이런 사과문이 법원의 판결에 반영된다면, 뇌물로 특혜를 샀던 국정농단 사건이 사법적 특혜로 마무리되고, 편법에 대한 판단이 편법적인 사과문 발표로 중단되는 셈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발표한 사과문의 내용 중 가장 놀라웠던 대목은 4대 세습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다. 그게 놀라운 이유는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고 적어도 30년 뒤에 발생할 일에 대한 약속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사과문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현재 진행 중인 자신의 불법승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는 사과문 속에 한마디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문제, 계열사 전환사채 발행 문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공여죄에 대해 어떻게 책임지겠다는 이야기는 왜 없는 걸까? 이 사과문은 30년 뒤의 미래에서 날아온 걸까? 다음번은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거듭 다짐하는 사과문에 대해, 사회는 되물을 수밖에 없다. 이미 일어난 일들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디테일이 몽땅 생략된 이야기는 진심을 전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재용 부회장의 사과문은 ‘트루 디테일’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삼성의 일류 제품들이 받아왔던 찬사를 받기 어렵다. 그는 사과문의 진짜 디테일을 좀 더 꼼꼼하게 메워야 하지 않았을까? 무노조 경영을 종식하겠다는 약속을 삼성의 노조파괴 공작에 항의하며 고공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용희씨를 찾아 사과하는 것으로 실천할 수는 없었을까?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남역 0.5평 시시티브이(CCTV) 철탑 위에서 일년 사계절을 악으로 버틴 노동자를 땅 위로 불러 끌어안을 수는 없었던 걸까? 위로금 500만원이 든 봉투로 옷에 붙은 먼지처럼 털어내려 했던 반도체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의 유족을 찾아 노동권 보장 계획이 담긴 편지를 전달할 수는 없었을까? 편법 승계 과정에서 막대한 손해를 본 주주들에게 보상하기 위해 삼성계열사 보유 지분을 매각하는 계획을 발표할 수는 없었던 걸까?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복구하기 위해 기업 총수에게 굴욕과 불이익을 감수하라는 요구는, 범죄에 대한 처벌을 사과문 한장으로 ‘퉁치려는’ 시도에 육박할 만큼 무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과문은 무리함 없이 처음부터 이렇게 쓰여야 했다. “더 이상 편법에 기대거나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방식으로 사태를 무마하지 않겠습니다. 법이 정한 대로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참회의 진심이 담긴 사과문이 그렇게 쓰이지 않았던 경우가 단 한번이라도 있었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우크라이나 전쟁을 없애야 한다, 북한군이 배우기 전에 [세상읽기] 1.

우크라이나 전쟁을 없애야 한다, 북한군이 배우기 전에 [세상읽기]

여자대학, 공학 전환은 답이 아니다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2.

여자대학, 공학 전환은 답이 아니다 [권김현영의 사건 이후]

이제 ‘사랑꾼’ 김건희 여사를 확인할 시간 3.

이제 ‘사랑꾼’ 김건희 여사를 확인할 시간

위기의 삼성에서 바뀌지 않은 것 [한겨레 프리즘] 4.

위기의 삼성에서 바뀌지 않은 것 [한겨레 프리즘]

문학이 하는 일, 슬픔에 귀를 여는 것 [김명인 칼럼] 5.

문학이 하는 일, 슬픔에 귀를 여는 것 [김명인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