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29일 오후 청와대에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와 만나 환담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왜 ‘민간인 임종석’이 나섰나?”
최근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창작과 비평> 여름호 대담에서 밝힌 주장을 접하고 든 생각이다. 이 대담에서 임 전 실장은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유엔사령부를 예로 들어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를 비판했다. 대북 제재 관련 사안 등을 조율하는 한-미 워킹그룹에 대해서는 “(대북 제재에) 과도한 해석을 내세우는 워킹그룹에 통일부가 들어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임 전 실장이 꺼낸 이야기 자체는 새롭지 않다. 지난해부터 대북 교류협력단체, 통일운동단체, 전문가들이 비슷한 주장을 자주 해왔다. 예를 들어 경실련통일협회는 지난 1월 남북관계 전환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어 “남북관계 복원을 가로막는 한-미 워킹그룹을 즉각 폐쇄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워킹그룹을 설치하라”고 주장했다.
같은 말이라도 임 전 실장이라 눈길을 끌었다.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북 정책을 추진할 분위기를 만들려고 임 전 실장이 애드벌룬을 띄웠다는 분석이 많다. ‘민간인 임종석’의 말에 미 국무부 당국자가 ‘남북협력은 비핵화에 발맞춰야 한다’고 이례적으로 논평한 것도 이런 배경일 것이다.
전직이 나서는데 남북관계 주무 부처인 통일부는 뭐 하고 있을까. 임 전 실장은 <창작과 비평> 대담에서 비건 대표의 압박에 “외교부 스톱, 통일부도 얼음땡”이라고 말했다. 아무 결정도 못 하고 역할을 못 했다는 것이다.
학자, 전직 고위 관료 중에도 “남북관계를 주도해야 할 통일부가 청와대 뒤에 숨어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참여정부 때는 통일부 장관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맡았는데, 문재인 정부의 통일부는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눌려 지낸다는 뒷말도 나왔다.
지난해 12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경기도는 북한 개풍양묘장 조성 사업에 필요한 물자 152개 품목에 대한 대북 제재 면제 승인을 유엔에서 받았다. 경기도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대북 제재 면제신청서를 유엔 대북제재위원회에 접수시키고 설득 노력을 폈다. 당시 북한과 교류협력사업을 하는 민간단체들은 통일부가 남북교류협력에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판했다. 통일부가 ‘대북 제재 때문에 못 한다’는 이야기만 할 뿐 민간단체만큼이라도 미국과 국제사회를 설득하는 노력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4·27 판문점 선언 2주년을 맞아 “한반도 운명의 주인은 우리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으면 길이 열리기 마련”이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가겠다”고 밝혔다. 남북이 중심이 되어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다.
한반도 문제 해법으로 ‘국제화’와 ‘한반도화’ 두가지 방향이 있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는 9년간 한반도 문제를 국제화해 남북문제를 한-미 동맹 등에 의존해 풀려고 했다. 남북이 2018년 4월 판문점 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9·19 남북군사합의를 했지만 남북관계가 미국과 유엔의 대북 제재 벽을 못 넘고 있다. 남북관계를 북-미 관계의 종속변수로 취급하는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 관성이 컸다.
한국이 주도해 막힌 남북관계를 돌파하려면 탄탄한 국내 정치 기반이 먼저 필요하다. 4월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했다. 정부가 주도적이고 과감한 한반도 정책을 밀고 나갈 기반을 갖췄다. 이 바탕에서 시민사회와 정부가 할 일을 나눠 남북 교류협력 사업을 힘껏 추진할 수 있다.
드디어 통일부가 움직였다. 여상기 통일부 대변인은 지난 20일 정례브리핑에서 “(천안함 사건 뒤 대북 제재인) 5·24 조치는 지난 시기 역대 정부를 거치면서 유연화와 예외 조치를 거쳤고, 사실상 그 실효성이 상당 부분 상실됐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정세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통일부가 이번에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내고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을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실력을 발휘할 상황이 되면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실력을 보여줄 때가 왔다. 오랜만에 통일부의 시간이다.
권혁철 ㅣ 논설위원
nu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