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선희 ㅣ 경제부장
참여정부가 2006년 발표한 미래전략 ‘비전 2030’은 정책목표를 재정전망과 결합해 제시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었다. ‘2030년 복지지출 규모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국내총생산의 21%)’을 목표로 잡았고, 필요한 추가 재원은 25년간 국내총생산의 2%라고 밝혔다. 2010년까지는 증세 없이 세출구조조정 등을 통해 재원을 충당하고, 2011년 이후에는 “조달방안에 대해 국민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채무, 조세, 국가채무+조세 등 세 가지 방안을 예로 들었다. 어찌 보면 원칙적인 수준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야당인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은 “결국 증세하자는 것 아니냐”며 ‘세금폭탄론’을 퍼부었다. 증세론에 부담을 느낀 여당인 열린우리당마저 거리를 두었다. 이듬해 대선에서는 ‘감세’를 내세운 이명박 후보가 정권을 잡았다. 비전 2030은 사실상 폐기됐다.
이후 무상급식, 기초연금, 무상보육 등 복지가 점차 확대되고 이에 따른 지출도 늘어갔지만, 증세에 대한 거부감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 정부와 정치권은 일종의 ‘증세 공포증’에 시달린다.
애초 ‘증세 없는 복지’를 내세웠던 박근혜 정부는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 등 증세를 우회적으로 시도했다가 지지율이 하락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2015년 1월 터진 이른바 ‘연말정산 파동’이다. 당시 야당이었던 새정치민주연합은 참여정부 시절 보수층이 주도했던 세금폭탄론을 똑같이 이용하며 국민들의 조세저항을 부추겼다.
문재인 정부 역시 정권 초기부터 증세 문제에 소극적이었다. 집권 첫해 마지못해 극히 일부의 고소득층과 대기업에 대해 최고세율을 올리는 ‘핀셋증세’를 단행했을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아예 “중산층과 서민들 증세는 없다. 이는 5년 내내 계속될 기조”라고 못박기도 했다. 지난해 말 나온 문재인 정부의 장기 전략 ‘혁신적 포용국가 미래비전 2045’ 역시 재정확충 부분은 막연하다. “기업과 가계의 부담능력과 수혜 정도에 부응하여 합당한 증세 방안 도출을 위해 국민적 합의를 거친다”(총론)는 정도만 말할 뿐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재정지출, 정부의 한국판 뉴딜 추진 등을 계기로 ‘증세’가 공론장의 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예상됐던 대로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발표된 1분기 가계동향조사에서 소득격차를 나타내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지난해 5.18에서 5.41로 확대됐다. 자칫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했던 경험이 되풀이될 기미가 보인다. 과감한 사회안전망 강화 조처가 필요한 이유다.
문 대통령도 지난 1일 “이번 코로나19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시 격차가 벌어져선 안 된다”며 “이제야말로 격차가 좁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0년대 대공황 극복을 위해 루스벨트 대통령이 추진했던 뉴딜정책은 이후 미국 사회 소득격차가 대폭 줄어드는 이른바 ‘대압착’으로 이어졌다. 뉴딜정책의 한 축을 사회개혁으로 삼아 대대적 증세와 노동자 권리 강화를 함께 추진했기 때문이다.
3차 추경안을 위한 국채 발행 계획이 발표되면서 재정건전성 논란도 거세지고 있다. 재정 여력 등을 고려할 때 정부의 이번 계획이 무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복지처럼 지속적으로 재원이 필요한 사업은 조세와 사회보험료를 통해 재원을 확보하는 것이 정석이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국민부담률과 조세부담률은 26.8%, 20.0%(2018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약 34%, 25%)에 비해 낮은 것이 현실이다.
정부와 청와대는 여전히 “증세는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복지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한 재원 마련을 어떻게 할지 솔직하게 국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국민들의 삶을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만드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재검토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모든 정치적인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토마 피케티)인 조세 개혁을 논의할 적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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