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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만나고 싶으나 만나기 싫다’는 대북전단의 역설 / 조경일

등록 2020-06-08 15:32수정 2020-06-15 10:00

조경일 ㅣ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

대북전단이 또 논란이다. 독재정권에 탄압받는 인민들이 속히 해방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아마 모두 공감할 것이다. 속히 그런 날이 와야 하는데 문제는 대북전단 살포다.

대북전단은 언제부터 뿌렸을까. 1950년 남북이 갈라지고 서로 총부리를 겨눈 뒤 끝나지 않은 전쟁과 상흔의 결과다. 총부리로는 결국 서로를 굴복시키지 못했고 대신 서로의 마음을 회유코자 심리전술로 나왔다. 그러다 2000년 6·15 정상회담에서 남북은 ‘상호 비방 중단’에 합의하면서 ‘공식적’으로 대북전단은 사라졌다.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에선 ‘상호 적대행위 금지’ 합의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대부턴 대신 민간 위주로 대북전단이 꾸준히 살포됐고 오늘의 논란에까지 이르게 됐다.

공감을 얻지 못하는 대북전단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2014년 접경지역인 경기도 연천에서 살포된 대북전단에 북한군이 고사총을 발사하고 우리가 대응사격을 하는 총격전이 발생했다. 물론 불안은 온전히 접경지 주민들의 몫이었다. 70여년 동안 전쟁 공포와 트라우마를 견뎌오는 우리 자신에게 대북전단으로 다시 불안을 주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북한 인민들의 해방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나 또한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다. 그러나 그 방식이 이웃들을 불안과 트라우마로 다시 몰아넣는다면 과연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대북전단이 탈북민들에 대한 마음의 벽을 더 쌓아 올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대북전단은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현재 한국 사회에 정착한 탈북민이 3만3500여명에 달하고 탈북 이유와 과정은 다양하다. 그런데 대북전단을 보고 탈북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렇다면 왜 대북전단을 뿌리는지 다시 생각해보자. 더 많은 북한 주민을 탈북시키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세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저항하기를 바라는 것인가? 애석하게도 전자라면 불행한 탈북 역사의 연속일 뿐이고, 후자는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바라는 ‘위시풀싱킹’(wishful-thinking·희망사항)이다. 탈북이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체제에 대한 인민들의 저항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것을 누구보다 탈북민들은 잘 알고 있다.

다시, 왜 대북전단을 뿌리는가? 결국 서로 만나지 못함에 대한 갈망의 표현이다. 휴전선 철책선 군데군데에 “걸어서 10분, 뛰어서 5분”이라고 적힌 푯말들이 있다. 서로 월북과 월남을 회유하는 글귀인데 바로 우리의 만나지 못하는 마음이 심리전에 담긴 것이다. 탈북해보니 자유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또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는데 이런 이야기를 전해줄 길이 없다. 그래서 ‘삐라’(대북전단)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변했고 냉전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체제 경쟁은 오래전에 끝났고 북한은 자기 살기에도 벅찬 상황이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

그렇다면 대북전단 살포 말고 직접 만나서 우리의 이야기를 전해줄 방법은 없을까?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대북전단 살포 말고 직접 만날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보는 건 어떨까? 바로 남북 교류협력을 하라고 말이다. 대북전단의 소기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공식적이고 적극적인 길이 바로 남북 교류협력이다. 교류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제한적으로, 그렇게 신뢰가 쌓이다 보면 다양한 영역에서 남북이 만날 기회가 확대된다. 대북전단이 전하지 못하는 무수한 가능성을 만들 수 있고 북한 인민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만나야 신뢰가 쌓인다. 정부가 추진 중인 제3국에서 북한 인민 접촉이나 교류를 ‘승인’에서 ‘신고’제로 하는 ‘남북교류협력법’ 개정안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북전단 살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정작 주장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조속한 남북 교류협력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이 역설적이게도 남북 대화와 교류의 단절이고, 압박만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며 때로는 “전쟁 불사”도 담고 있다는 것이다. 만나고 싶으나 만나기 싫다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이제 직접 만날 수 있게, 적극적인 남북 교류협력을 주장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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