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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성폭력은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 이재성

등록 2020-07-20 17:43수정 2020-07-21 02:39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한겨레>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고 박원순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피해자에게 연대의 뜻을 밝히며<한겨레> 젠더데스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메시지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이재성│문화부장

박원순 서울시장이 떠나간 뒤 읽은 글 중에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왜 하필이면 고위 공직자마다 ‘여비서’가 달려 있어야” 하느냐는 문제 제기였다. 래디컬리스트다운 근본적 주장인 셈인데, 박노자의 글이 대체로 그러하듯 본질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권력을 가진 늙은 남성’의 수발을 드는 ‘젊은 여성’이라는 위계는 그 자체로 성차별적이다. 한국에서 위계는 부당한 지시나 명령에 대해서도 복종을 강제하고, 거부할 경우 조직 생활이 어려워지거나 끝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여비서’에 대한 성폭력 가능성은 이미 내장되어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지금 극장에 걸려 있는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박노자의 주장과 일견 모순된 지점에서 진실을 말한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폭력을 폭로한 사건이 세계 ‘미투 운동’의 도화선이었다고 흔히들 알고 있지만, 실은 그로부터 1년여 전에 <폭스 뉴스> 앵커들의 ‘폭탄선언’(bombshell)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트럼프의 마우스피스’라고 놀림당할 정도로 편파적인 우파 매체인 폭스 뉴스에서 일어난 ‘미투 이전의 미투’ 사건을 팩션(faction)으로 재현한 이 영화에서 여성 앵커들이 가해자로 지목한 사람은 30년 동안 폭스 뉴스 회장으로 군림했던 로저 에일스다. 그의 비서는 60살이 넘은 것처럼 보이는 여성 노인인데, 놀랍게도 이 늙은 비서가 ‘적극적 부역자’ 노릇을 하는 것처럼 비치는 장면이 있다. 무슨 짓을 해도 거리낄 게 없는 ‘절대 권력’과 비민주성이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의 자치단체장은 상대적으로 감시가 적은 ‘제왕적 권력’인데다, ‘젊은 여비서’라는 성차별적 위계가 제도적으로 이미 갖춰져 있어서 성폭력이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환경이 거의 완벽하게 준비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단체장이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단체장들의 잇따른 성폭력 사태는 진보를 자처했던 한국의 리버럴이 얼마나 권위주의적인 집단이었는지, 자신들이 싸워온 대상과 얼마나 닮아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2016년 촛불 항쟁 이후 사회 곳곳에 일상 민주주의가 싹트고 깊이를 더해가고 있기는 하지만, 권위주의 문화는 여전하다. 가까이는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부터 멀게는 20여년 전 대한항공의 연쇄 추락 사고 원인으로 지적됐던 조종실 안에서의 상명하복 문화에 이르기까지, ‘노’라고 말할 수 없는 구조적 폭력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권위주의 세력은 마치 현 정부에서만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는 것처럼 호도하지만 그들이 여당일 때도 여권 인사들의 성폭력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의 워싱턴 출장 수행 중 인턴을 성추행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성폭력은 정당이나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권리가 취약한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나는 보편적인 인권의 문제다. 지금 권위주의 세력은 민주당을 비난하는 재미에 취해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실컷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 내뱉는 비난의 말들이 인권의 ‘허들’을 높여놓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한번 올라간 허들은 쉽게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지난해 여름에는 세대로 갈리더니 올여름에는 젠더로 나뉘고 있다. 가정이 깨질 지경이라고 호소하는 이도 있다. 실망감과 의구심이 서로를 노려보고, 떠나간 사람의 업적에 대한 추념과 남아 있는 사람의 고통에 대한 연대가 날 선 가치 투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일부 여당 지지자들이 피해자에게 증거를 내놓으라고 닦달하는 현상은 자못 우려스럽다. 사법절차를 따르려 했던 피해자의 의도와 달리 여론재판을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마저 가해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 그들이 다른 사안에서 펼쳤던 정당한 논리조차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사망했다고 해서 미투 운동 시작 이후 어렵게 합의가 이뤄진 ‘피해자 관점’의 원칙을 허물 수는 없는 일이다.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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