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거리의 칼럼] 호박잎, 오이지, 새우젓 / 김훈

등록 2020-08-31 04:59수정 2020-09-01 17:10

호박잎, 오이지, 새우젓은 여름의 반찬이다. 요즘처럼 날이 덥고 습할 때 이 반찬의 맛은 더욱 빛난다.

호박잎은 김에 쪄서 된장국물에 적셔서 먹는데 즙이 많이 나와서 입안에 가득 찬다. 호박잎의 촉감은 거칠면서 편안하다. 호박잎을 먹을 때 나는 순한 소나 양이 되어서 향기로운 풀을 뜯어먹는 느낌이다. 호박잎의 맛에는 오래된 농경사회의 평화가 들어 있다. 호박잎은 낮은 자리의 음식이다. 호박넝쿨에 맛있는 새잎들이 날마다 돋아나는 걸 보면 기쁘고 놀랍다.

좋은 오이지를 만들려면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지만, 기술의 흔적이 남아 있으면 좋은 오이지가 아니다. 시간이 베푸는 연금술이 오이를 오이지로 바꾸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날오이의 맛은 젊고 가볍고 들떠 있다. 오이지는 날오이의 들뜬 기운을 가라앉혀서 맛의 중심을 안정시키면서도 오이의 청량감을 훼손하지 않는다. 좋은 오이지에서는 새큼한 맛이 나는데, 이 맛은 시간의 맛이다. 오이지는 햇볕이 뜨거운 날 점심밥 때 먹어야 맛있다. 오이지는 명석하고 선명해서 여름의 나른함을 물리친다.

더워서 입맛이 없을 때 나는 밥을 물에 말아서 숟가락 위에 새우젓을 두어 마리 얹어서 먹는다. 새우젓은 맛의 엑기스다. 이 맛은 극소량의 재료와 간만으로 이루어진다. 새우젓 맛의 끝자락은 한 줄기 희미한 비린내의 여운을 남기며 마음속으로 스미는데, 이것은 먼 바다로부터의 기별이다.

여름 밥상의 새우젓은 삶의 잃어버린 경건성을 일깨워 주는데, 지나치게 금욕적이어서 오래갈 수가 없고, 몇 끼 지나면 또 고기와 생선이 먹고 싶어진다. 이래서 인간의 문제는 끝이 없다.

작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1.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북한군 포로의 얼굴 [코즈모폴리턴] 2.

북한군 포로의 얼굴 [코즈모폴리턴]

[사설] 반도체보조금 약속 뒤집으려는 미국, ‘불량 국가’인가 3.

[사설] 반도체보조금 약속 뒤집으려는 미국, ‘불량 국가’인가

[사설] 딥시크 충격, 한국도 빠른 추격으로 기회 살려야 4.

[사설] 딥시크 충격, 한국도 빠른 추격으로 기회 살려야

트럼프는 이겼지만 윤석열은 질 것이다 5.

트럼프는 이겼지만 윤석열은 질 것이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