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ㅣ문화부장
‘조국 흑서’라는 별칭을 가진 책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는 ‘탈진실 시대’에 대한 개탄으로 시작한다. 대담으로 이뤄진 책의 앞부분 사회를 맡은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는 “객관적 사실보다 편향된 신념이 뉴스를 지배하고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포스트트루스(Post-Truth, 탈진실) 시대”라며 “한국 사회도 가짜뉴스가 판치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하고 있”다고 말문을 연다. 그리고 자신이 책(<윤지오 사기극과 그 공범들>)까지 펴낸 바 있는 ‘장자연 사건의 증언자’ 윤지오씨에 대한 ‘편향된 신념’을 늘어놓는다. 윤씨를 지지했던 여론을 싸잡아 “‘<조선일보>를 잡으러 온 것이니 윤지오는 무조건 옳다’ 이런 진영 논리의 결과”라고 비판한다. 정치철학자 조정환이 <까판의 문법>과 <증언혐오>라는 두 권의 책을 통해 윤씨가 사기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의 완벽하게 밝혔는데도, 서 교수는 아무런 언급도 반박도 없이 ‘객관적 사실’에 대한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이 책에는 서 교수의 새로운 진영이 어느 쪽인지 알려주는 편린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는 이렇다. “의사가 될 실력이 안 돼서 증명서를 위조해야 했던 조국 전 장관 딸에 비하면 나경원 전 의원 아들은 특권층이 받을 수 있는 특혜에 불과한 데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것도 문제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위조 같은 행위에 비할 바는 아니거든요.” 재판을 통해 검찰의 공소 사실을 반박하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 ‘동양대 표창장 위조 의혹’을 기정사실화하는 성급한 태도도 문제지만, 나경원 전 의원 관련 의혹에는 ‘특권층이 받을 수 있는 특혜’라며 애써 너그러워진다. 서 교수가 경멸적 의미로 자주 쓰는 ‘진영 논리’라는 비난의 화살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나머지 대담 참여자들은 대체로 진보답지 않은 진보에 불만을 느껴 새로운 진보를 모색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특히 사모펀드 의혹 관련 전문가로 등장하는 권경애 변호사는 사모펀드를 신자유주의적 금융에 의한 약탈 행위로 간주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우리 사회 ‘진보’의 평균보다 더 왼쪽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권 변호사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사모펀드 가입 행위 자체를 견딜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모펀드가 합법적인 투자 상품이긴 하지만, 나는 권 변호사의 비판적 신념을 존중하고 싶다. 그러나 유죄 여부를 가리는 기준은 신념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일 수밖에 없다. 사모펀드와 관련한 조 전 장관의 권력형 비리 의혹은 검찰 역사상 최대의 강제력을 집중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사실로 드러난 게 없다. 검찰이 그토록 입증하고 싶어 했던 ‘정경심 교수의 코링크피이(PE) 실질적 지배’ 가설도 무너지는 중이다. 검찰이 코링크피이 투자금이라고 주장하고, 정 교수 쪽이 대여금이라고 반박하는 10억원은 2018년 8월 돌려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언론이 거의 보도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나는 이 사실을 ‘조국 백서’로 불리는 <검찰개혁과 촛불시민>을 읽고서야 알았다. 검찰의 수사 착수 1년 전에 이미 전액을 회수했다면, 이 돈은 투자금이 아니라 대여금일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조 전 장관의 5촌 조카 조범동씨의 1심 재판부도 이 돈의 성격은 대여금이며, 권력형 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이 책은 ‘아마도’와 ‘같아요’ 같은 유보적 표현을 빌려 권력형 비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여전히 예단하고 있다. 그리고 “추가로 수사의 필요성이 생겨서 강제 수사력이 발동되지 않는 한, (…) 이 이상의 논의는 추측과 추론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더 심한 강제 수사를 벌여야 진실이 밝혀진단 말인가. 이미 드러난 사실조차 무시하고 억측하는 것이야 말로 ‘탈진실’ 행태가 아닌지 묻고 싶다.
이 책이 4주째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키고 있는 사이, 다른 신문도 아닌 <조선일보>가 기자들을 상대로 한 신뢰도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우리 앞에 홀연히 나타난 이 두 가지 ‘1위’는 사실과 신뢰를 중시하지 않는 탈진실 시대의 위험한 단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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