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혁 ㅣ 전국부장
가계부채가 한창 늘어가고 집값 오름세가 본격화하던 2018년 초, 한국은행 조사국이 세대별 가계부채 특징을 분석한 보고서를 냈다.
가장 눈에 띈 대목은 은퇴 시기(55~64살) 80.3%였던 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65~74살 105.5%, 75살 이상 121.2%로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같은 나이대에 미국은 115.7%→96.4%→70.4%, 유럽 국가들은 43.8%→33.9%→17.3%로 부채비율이 낮아졌는데, 한국만 거꾸로였다. 노년에 접어들면 벌이와 쓰임새 모두 줄여가는 게 보통일 텐데, 한국의 노인들은 왜 늙어갈수록 빚이 늘어날까.
보고서는 그 해답도 일부 담고 있었다. 2013~2016년 사이 해마다 20% 가까이 급증하던 금융부채 증가액을 분석했는데, 그 기간 180조원가량 늘어난 주택 실수요용 금융부채(336조원→514조원) 증가액은 40~60대 이상의 3~5분위(소득 상위 60%)에서 고르게 늘었더란다.
반면에 주택 투자용 금융부채(150조원→239조원) 증가액은 50대와 60대 이상의 5분위(소득 상위 20%)가 증가분의 90% 가까이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쉽게 풀어보자면 이렇다. ‘내집 마련’을 위한 대출은 세대별로는 40대 이상, 계층별로는 중산층·고소득층에서 고루 늘었다. 그런데 주택 투자를 위해 빚을 낸 압도적 다수는 50대와 60대 이상의 고소득층이더란 얘기다. 이후 더욱 가팔라진 가계부채 급증과 집값 급등 국면에 누구 책임이 큰지(=누가 승리했는지)는 해설이 필요 없으리라.
통계청 주택소유통계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감지된다. 2012년 17.6%였던 서울시내 주택 소유자 가운데 60대 비율은 2018년엔 20.1%로 높아졌다. 70대 비중도 9.4%에서 12.1%로 뛰었다. 80대 이상은 2%에서 3.7%로 비중이 두배 가까이 폭증했다. 반면에 같은 기간 30대 주택 소유자 비중은 16.3%에서 12.9%로, 40대 비중은 25%에서 23.5%로 낮아졌다. 뒤늦게 청년층 일부가 ‘영(혼까지) 끌(어다) 대출’까지 동원하고 나섰지만, 그럴수록 자리를 선점한 이들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질 뿐이었다.
이런 흐름은 젊을 때 돈 벌어 집을 사고, 왕성한 경제생활을 하던 중장년기에 집을 넓히고, 은퇴 뒤엔 집을 처분하거나 자식에게 넘기고 퇴장하는 ‘주택시장에서의 생애주기 흐름’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젊은층이 주택시장에서 밀려나게 된 책임을 노인 세대에게 물을 수는 없다. 노후 보장 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서 능력 있는 장년·노년층 일부가 자신의 경험에 바탕해 부동산 시장에 베팅하고 승리한 걸 두고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나. 게다가 노년 빈곤에 허덕이는 이들도 많고, 아무리 노년 세대가 움켜쥔 부동산이 늘어난다 한들 결국엔 현재 청년 세대인 자녀나 손주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나.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노·장년층) 세대 내 격차와 (노·장년층-청년층 사이) 세대 격차가 합쳐져 격차의 대물림으로 확대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출신 배경에 따른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계층 고착화가 심화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정치, 정책이 필요할까. 빈부격차 확대의 고갱이가 자산격차 확대라면 이를 해소하기 위한 자산에 대한 과세 강화(사실은 정상화)가 답 아닐까. 상황이 이런데도 당·정·청은 얼마 전까지 주택보유세 감면 대상을 공시가격 6억원 이하로 할지, 9억원 이하로 할지를 두고 지난한 샅바싸움을 벌였다. 야당은? 사실 주택보유세 감면 필요성을 가장 먼저 들고나온 게 국민의힘 소속 조은희 서울 서초구청장이었다. 자산 재분배책을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격차 고착화를 위해 정치권과 정책당국이 합심하고 나선 모양새 아닌가.
집 가진 세대·계층에 정치와 정책의 초점이 맞춰질수록, 반대편 집 없는 청년층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리라.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데, 이젠 ‘내집 마련’이라는 더 따기 어려운 별까지 나타났으니. 가뜩이나 가진 것 없어 서러운데, 공론의 장에서 자신을 대변할 이조차 없다는 점은 더 큰 서글픔이리라. 기성세대의 일원으로서 안타깝고 미안할 뿐이다.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