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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멜라니아, 검은 호랑이, 그리고 미 대선 / 전정윤

등록 2020-11-16 17:25수정 2020-11-24 08:31

전정윤 ㅣ 국제부장

미국 조사기관과 언론, 그들에 의존해온 전세계 국제부 기자들은 2016년 미 대선 승자 예측에 실패했다. 올해 미 대선 캠페인 및 투·개표 기간 내내, ‘공멸’을 피하기 위한 눈치 보기가 극심했던 이유다. <한겨레> 역시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세심하게 미 대선 보도를 이어왔지만, 결전일이 가까워질수록 조 바이든 쪽으로 기울었다. 현지 조사기관이 지난번 실수를 보정한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결론이 명확하게 ‘바이든 승리’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들여 예측한 대로 바이든이 당선돼 한숨을 돌리는가 싶었는데, 드라마틱했던 대선 보도의 끝자락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에 일격을 당했다.

사전 여론조사와 달리 플로리다 등 경합주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선전이 두드러졌다. 트럼프 지지층의 극심한 ‘여론조사 기피’가 원인으로 지목되는데, 특히 바이든 승리의 근거지로 예측됐던 ‘러스트벨트’가 불안했다. 뒤늦게 우편투표함이 열리면 트럼프의 ‘붉은 신기루’도 걷힐 걸 알았지만, 미시간에서 바이든이 5%포인트 차로 뒤지자 외신도 국내 언론도 술렁였다. 트럼프가 재선이라도 될 것처럼 독자를 어지럽히는 속보 전쟁이 불붙었다.

그때 현지 언론보다 정확한 ‘공덕동 현자’의 실시간 개표 분석이 없었더라면, <한겨레>도 ‘디지털 부화뇌동’에 동참할 뻔했다. 주별 개표 현황을 지켜보던 선임기자는 “바이든이 우세한 미시간 대도시는 아직 개표가 이뤄지지 않았고, 디트로이트 투표함이 열리면 바이든이 따라잡는다”고 분석했다. <한겨레>는 이를 바탕으로 일찌감치 초고를 써뒀고, “미시간 바이든 역전”이라는 외신 한 줄 속보가 뜨자마자 그 의미를 분석한 디지털 기사를 전송했다. 4일 밤 11시14분 출고된 ‘미시간 막판 역전…바이든, 승기 잡았다’는 심야임에도 조회수가 가파르게 치솟았다.

미시간 사례처럼 디지털에서 주목받은 <한겨레>의 미 대선 기사들은 크게 두 종류였다. 오랜 내공이 뒷받침된 전문적이고 발 빠른 분석 기사, 혹은 다양한 외신과 서적을 두루 취재해 부가가치를 높인 뒤 사람 중심으로 쉽게 풀어낸 기획기사였다. 양쪽 다 읽기엔 속 시원해도 쓰기는 심장이 조이는 고난도다. 하지만 국제부 전원이 달라붙어 준비한 이 모든 과정이 무색하게, 정작 미 대선 기간에 가장 많이 읽힌 국제기사는 따로 있었다.

트럼프가 대대적 불복 소송전을 공식화한 6일,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국제기사는 “강렬한 뒷모습 ‘검은 호랑이’ 내려왔다…세계 7~8마리뿐”이었다. 그날, 미국 민주주의 위기를 다룬 “지난밤 패자는 미국이었다” 기사도, 펜실베이니아에서 바이든이 역전해 사실상 승리를 굳혔다는 속보도 위풍당당한 검은 호랑이 앞에선 무기력했다.

사흘 뒤인 9일엔 “멜라니아가 트럼프와 이혼할 날을 계산 중”이라는 영국 황색지발 기사가 허다한 미 대선 기사들을 제치고 독보적 화제를 모았다. 국내 디지털 1~2위라는 언론사는 정보원도 불분명한 이 기사를 전체 톱기사로 걸었다. 통탄하다가 <한겨레> 누리집에 들어가 보니, 구석에 같은 내용의 <연합뉴스> 기사가 배치돼 있었다. 조회수를 관리하는 디지털 담당자가 차마 국제부에 써달라고 하지 못하고 통신사 기사를 올린 모양이었다. 이 <연합뉴스> 기사엔 ‘한겨레가 이상해졌다’는 댓글이 달렸지만, 디지털 담당자의 고충이 전해져 되레 애잔하고 미안했다.

<기자협회보>가 10일 네이버 ‘많이 본 뉴스’ 빅데이터를 분석했다. 많이 읽힌 국제기사가 궁금해 원자료를 들여다보니, 가령 10월8일치 1~30위는 ‘유부남이 감히 내 딸 달라고? 재벌사업가 토막 살해한 아빠’(1위) 등 대부분 쇼킹한 사건·사고와 가십이었다. 혹여 미 대선 관련 기사 중에도 1위가 있나 찾아봤더니, 10월3일 1위가 ‘백악관 마비시킨 힉스, 트럼프 수양딸 불리는 모델출신 88년생’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언론의 최다 조회수 기사들인데 하나같이 벤치마킹이 불가능했다. 역시 ‘빠르고 전문적인 분석 기사와 부가가치 높고 읽기 쉬운 기획 기사’ 말은 쉽지만 뼛골 빠지는 그 길만이 살길인가? 질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많이 읽힌 기사 목록을 들여다볼수록 ‘검은 호랑이’와 ‘멜라니아’에 대적할 자신감이 떨어져 서둘러 엑셀창을 닫았다.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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