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초등학교 600여곳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서울 용산구 한남초등학교 교정의 이승복 어린이 동상. 한남초등학교 행정실 관계자는 “한달 전쯤 철거됐다”고 확인해주었다. 2018년 7월의 한남초등학교 이승복 동상 모습. 고경태
고경태 ㅣ 오피니언 부국장
올해 11월의 역사 인물은 단연코 전태일이었다.
언론들마다 앞다퉈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50년 전의 죽음은 21세기에도 바뀌지 않은 장시간 노동착취 현실을 환기시켰다. 택배노동자를 비롯한 오늘의 전태일들이 호명되었다.
나는 전태일과 잠시 동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이를 다음달인 12월의 역사 인물로 떠올려보았다. 11월의 전태일이 노동이 배제된 산업화의 그늘을 보여준다면, 12월의 그는 롤러코스터를 타던 분단시대를 보여준다. 둘은 따로 떨어질 수 없는 역사다. 전태일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불타오른 1970년 11월13일에서 시계를 2년 앞으로 돌려본다. 52년 전인 1968년 이맘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북한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특수부대원들이 강원도 산간지역을 헤맸다. 남한에 혁명부락을 세운다는 목표 아래 10월30일부터 8개조 120명이 침투한 이른바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이다. 닥치는 대로 민간인을 죽였다. 그러나 민가를 습격하면 여자 옷이든 아이 옷이든 가리지 않고 훔쳐내 몸에 두를 정도로 옷이 없었다. 국군과 교전하다 총과 식량을 분실했다. 낙엽이 다 떨어진 산비탈에서 헬리콥터를 만나면 숨을 곳이 없었다. 11월 말이 되면서 거지부대가 되어갔다. 북으로의 도주만이 살길이었다. 그러던 중 12월9일 밤 11시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 중턱의 귀틀집에 들어갔다. 속사국민학교 계방분교 2학년 이승복의 집이었다.(이동욱의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참조)
이승복을 전태일과 엮어본다. 언젠가 한번 이승복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50주기였던 2년 전에는 타이밍을 놓쳤다. 이제야 쓴다.
학살 생존자이자 목격자인 형 이학관(당시 15살)에 따르면 그날 ‘공비’들은 칼을 뽑아 들어 동생 이승복의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입을 찢어 죽였다는 것이다. 이학관은 동생이 “북한이 좋니 남한이 좋니” 따위 물음에 학교에서 배운 대로 “우리는 북한은 싫어요, 공산당은 싫어요”라고 대답했다고 증언했다. <조선일보>가 이를 자극적으로 크게 보도하면서, 죽은 이승복은 박정희 정권의 멸공 마케팅 모델이 되었다. 전국 초등학교엔 이승복 동상이 세워졌다.
이승복은 우파였나? 그저 시골소년이었다. 정의하자면,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였다. 남북한이 체제 경쟁과 함께 민간인 학살 경쟁을 하던 때였다. 1월 김신조 사건에서 시작되어 12월 울진·삼척 사건으로 끝난 1968년은 대한민국을 완벽한 병영국가로 거듭나게 한 전환기였다. 박정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며 무한질주했다. 2년 뒤 전태일의 절망이 불꽃으로 변했다.
전태일 신화는 살아 있다. 이승복 신화는 끝났다. 관제 신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공의 인물이라는 오해는 억울하다. 희화화되기도 일쑤다. 1990년대에 <조선일보> 오보·조작설이 불거졌고 이를 둘러싼 법정 공방이 벌어졌다. 2006년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죽음의 정황에 관한 기본 사실관계가 바뀌진 않았다. 죽어서도 상처받는 이승복에게 연민을 느낀다. 이제는 그를 차분히 희생자 자리에 놓아줄 때다.
22살 전태일은 주체적 인간이었다. 9살 이승복은 주체적 자각을 할 겨를조차 없었다. 북한군에게 악랄한 방법으로 살해당했고, 악랄한 남한의 독재자에게 오랫동안 이용당했다. 4년 전까지 서울시 600여개 초등학교 중 이승복 동상은 세 곳에 남아 있었다. 2016년 8월 더불어민주당 소속 오경환 서울시의원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냉전 독재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상징물이 21세기 교정에 존재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며 남은 동상들의 철거를 요구했다. 이 글을 쓰며 확인해보니, 그 뒤 3개의 동상은 모두 사라졌다. 용산구 한남초등학교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동상은 한달 전 철거됐다. 냉전시대의 상징물도 역사 유적이다. 몇 개 안 남았었다면 더욱 그렇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만큼 한반도 분단 대결체제의 악마성을 드러내주는 비극적인 장면과 대사는 없다. 휴전상태가 마침표를 찍지 않았기에, 그 동상은 남과 북의 과거를 돌아보며 수많은 질문을 던지게 했다. 반공소년 신화의 포장지를 뜯어내면, 이승복은 보수세력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12월엔 그를 기억해보자.(※다음 칼럼에선 제2의 이승복들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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